컨텐츠 바로가기

09.21 (토)

인간성 상실의 이 시대, 선시로 깨달음 얻어야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해남 대흥사서 첫 ‘한국선시문학 포럼’ 열려

경향신문

선시(禪詩)의 의미와 가치를 다각도로 살펴보는 ‘제1회 한국선시문학포럼’이 20일 전남 해남 대흥사에서 열렸다. 사진은 포럼 발제자·토론자의 일부로 왼쪽부터 문학평론가 권희철·하응백, 시인 최승호·김명인, 일지암 법인 스님, 시인 박규리·이은봉·황지우, 월남사 주지 법화 스님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고려 진각국사 혜심의 선시 바탕

‘현대시와 비교’ ‘선시 가치’ 살펴

“오늘날 선시에서 얻어야 할 것은

우리의 편견·고정관념 깨는 것”


먼저 선(禪) 수행자가 읊은 선시(禪詩) 한 수를 보자. ‘池邊獨自坐(지변독자좌) 池低偶逢僧(지저우봉승) 笑相視(묵묵소상시) 知君語不應(지군어불응)’. 우리나라 첫 선시집을 내고, 선시라는 장르를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 고려시대 진각국사 혜심(慧諶·1178~1234)의 시다. ‘연못 가에 홀로 앉았다가/ 우연히 못 바닥의 한 중을 만났네/ 서로 바라보며 묵묵히 말없이 웃으니/ 말 걸어도 응답하지 않을 줄 알아서네’로 해석해본다. ‘對影(대영·그림자를 마주하고)’이란 이 시는 전문가들도 이해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읽는다. 물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와 마주한 상황인데, 시문학적 분석을 접어두고 선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공(空)과 색(色), 실상과 허상 개념까지 얽혀들어 풀어내자면 끝이 없다. ‘시인 차창룡’으로 살다 출가한 동명 스님은 “윤동주와 월트 휘트먼이 모더니즘의 자아의식을 보여준다면, 오래전의 진각혜심이 오히려 포스트모던하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선시는 선 수행자가 궁극의 진리를 깨치고 그 깨달음의 경지를 시로 읊은 것을 말한다. 그런데 선가에서 깨달음, 진리는 말과 글이 아니라 마음으로 전해진다. 말과 글을 초월하는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다. 선시에는 기존 인식과 편견을 넘어서고 상상을 초월하는 은유와 상징, 촌철살인의 풍자가 녹아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선시는 선사상, 시문학, 철학 세계의 만남으로 빚어진 불교문화의 고갱이란 평가다. 중국 선시나 일본 하이쿠와도 달라 동아시아에서 독특한 자리에 있다. 종교, 문학, 철학, 미학 등 다방면에서의 연구·분석이 요구되는 ‘화수분’이지만 그동안 소외된 게 사실이다.

지난 20일, 매화 꽃망울에서 봄기운이 느껴지는 전남 해남 대흥사(주지 월우 스님)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법인 스님(대흥사 일지암)과 황지우 시인(한국예술종합학교 전 총장)이 중심이 된 ‘한국선시문학포럼 준비위원회’와 대흥사·월남사(주지 법화 스님) 등이 마련한 ‘제1회 한국선시문학 포럼’이다. 전문가들이 여러 시각에서 선시 세계를 짚어보는 유례 드문 자리다. 포럼 주제는 ‘마음의 피뢰침-선과 시, 진각혜심의 선시와 오늘의 한국 시문학’. 한국 첫 선시집인 혜심의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무의자’는 진각혜심의 호)을 바탕으로 선사상과 선시, 선시와 현대시의 관계, 나아가 인간성이 상실되고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이 시대 선시의 가치를 살펴봤다. 특히 포럼준비위는 향후 선시를 더 연구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각 부문 전문가들로 ‘한국선시문학포럼’을 결성, 다양한 활동을 펼치기로 의견을 모았다.

경향신문

‘마음의 피뢰침-선(禪)과 시(詩), 진각혜심의 선시와 오늘의 한국 시문학’을 주제로 한 제1회 한국선시문학포럼.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포럼에서는 혜심 선시가 중심이었지만 발제자와 토론자들의 치열한 논의로 원효대사부터 지난해 입적한 설악산 오현(무산) 스님까지 1000여년의 시공을 초월한 수행자와 선시들이 등장했다. 논의점도 선시의 범위를 어디까지 봐야 하느냐부터 선승의 선시와 현대 시인의 시 사이에 놓인 차별점과 공통점, 선시 독해, 심지어 선종사상까지 다채로웠다. 발제자로 나선 학담 스님은 “선시는 화두타파가 세계의 실상과 하나 되는 곳에서 발현되는 언어의 꽃”이라고 밝혔다.

박규리 시인은 혜심의 시 ‘하늘과 땅을 대신해 답함’ ‘목련’ ‘전몰암에 잠시 살면서’ 등을 “아름다운 시적 리얼리티와 선시학적 메타포로 이룩”한 것으로 평가하며 “선시 이해의 관건은 ‘시의 이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이해’에 있다”고 밝혔다. 특히 “선의 본질이 고정관념을 깨는 데서부터 출발하듯 선시의 최종 목적도 우리의 아견을 혁파하는 데 있다”며 “선시에서 얻어야 할 것은 지금 우리들의 편견과 고정관념에서의 탈피”라고 강조했다. 동명 스님은 “불교는 형이상학이라기보다 실천론이고, 선시도 ‘어떻게 살 것인가’란 물음에 대한 문학적인 방식의 답이라 생각한다”며 ‘단순하고 소박한 수행자로 살자’ 등 혜심의 선시를 실천론으로 읽었다.

김명인 시인은 선시의 형식과 내용, 선시를 현대에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를 분석했다. ‘벌거벗은 허공, 무의자’란 독특한 발제문을 내놓은 최승호 시인은 “무의자는 ‘스님네란 콧구멍 없는 소’라고 했는데 그 소는 고삐를 맬 수 없고 가둘 수도 없다. 시인들도 콧구멍 없는 소 같은 존재”라며 “‘왜 시를 쓰느냐’는 질문에 답한 적이 없는데 이제는 ‘시인이 되려고, 콧구멍 없는 소가 되려고 쓴다’고 말하겠다”고 밝혔다. 토론자로 이은봉 시인과 하응백·권희철 평론가, 고영섭(동국대)·차차석(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가 참여했다.

포럼을 기획한 법인 스님과 황지우 시인은 “발제자, 토론자들의 수준 높은 논의로 아주 만족스럽다”고 입을 모았다. 법인 스님은 “한국선시문학포럼의 사단법인화를 통해 선시 연구와 출판 등을 펼칠 예정”이라고 말했다. 다음달 거의 20년 만에 시집 출간을 앞둔 황 시인은 “선시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다시 보게 됐다”며 “낚싯줄에 뭔가 ‘대물’이 걸린 듯한 포럼”이라고 전했다. 포럼 참가자들은 복원을 앞두고 발굴조사가 진행 중인 월남사(강진) 터 답사도 했다. 진각국사가 머물며 크게 중창한 월남사 터에는 ‘진각국사비’(보물 313호) 등이 남아 있다.

해남 | 글·사진 도재기 문화에디터 jaekee@kyunghyang.com

최신 뉴스두고 두고 읽는 뉴스인기 무료만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