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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이때쯤 가보고 싶은 그곳-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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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자 상해 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이기도 한 해이다. 임정은 1919년 4월11일 상해에서 발족되었고 망명정부로서의 조직을 갖추었다. 그새 해방과 미군정과 분단, 전쟁, 그리고 숱한 분열과 논란을 겪었고 그 성장통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은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는 우리 스스로 이룬 것이 아닌 그 어떤 희생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알게 해주는, 숙연하고도 감사한, 그리고 오싹한 공간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100주년, 한번쯤 가볼 만한 곳임에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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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다행스러운 세상을 살고 있을까?

사사로운 이야기 하나. 수십 년을 만나고 있는 친구가 있다. 짱짱했던 시절, 그도 나도 가난했다. 그리고 그 세대다운 비판정신이랄까? 아니면 투덜거림? 불평불만? 어떻게 표현해도 틀릴 것 없는 ‘세상을 향한 시선’이 있었다. 지금, 그는 부자가 되어 있고 나는 지금도 가난하다. 어느 날, 나는 여전히 시끄러운 세상, 여전히 득세하고 있는 친일독재 세력 내지 끄나풀에 대한 툭툭한 마음을 드러낸다.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영근아, 세상이 쉽게 변하지 않아. 난 내가 태어나 살고 있는 이 시간에 식민지도 없고, 전쟁도 없고, 쿠데타도 없고, 군사독재도 없고, 좌에 붙어야 할지 우에 붙어야 할 지 결정할 이유도 없고, 질척거리는 판자촌에서 공동화장실을 사용하지 않아도 괜찮고, 대통령을 향해 대놓고 불평하고, 엉길 수 있는 오늘을 그리고 힘껏 싸워준 선조, 선배들에게 감사한다. 넌 일제시대 때 태어났으면 뭘 하고 있었겠니? 나카무라 형사의 정보원? 아니면 독립운동? 개화문화 신봉자? 아무 생각없이 사는 거? 아마 넷 다 괴로운 삶이었을 거야. 으흐흐”.

그래서 다행이란 말인가? 딱히 그렇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친구의 언어에는 착잡함이 잔뜩 스며있었으며, 나의 투덜거림도 꼭 세상을 향한 저주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단지 우리가 받은 것처럼, 무언가 내놓고 떠나야 하지 않겠냐는 부채의식에 대해 친구에게 이야기 했고, 그 또한 끄덕끄덕했을 뿐. 어떤 이야기를 나누든, 친구와 나의 시선은 수십억 인류의 세상을 향한 개인의 개념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렇게 ‘서로의 생각을 담담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음’ 하나만으로도 감사한 것만은 사실이다. 과분하든 부족하든, 오늘의 자유는 누군가의 피와 젊은 죽음이 쌓여 이뤄진 것임을 모를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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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 제1호 사형수 정미의병장 허위, 105인 사건의 주요 인물, 3.1운동의 손병희, 유관순 등 3000여 명, 안창호, 한용운, 이병희 등 10만 명의 독립운동가가 투옥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거나 고문 끝에 죽임을 당했거나, 석방 뒤 후유증으로 일찍 죽어야만 했던 그 모든 의로운 선조들의 손발을 묶어놓았던 곳, 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을 향하는 몸과 마음이 유난히 춥고 민망했던 것은 추위도 추위였지만 알량한 양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을 찾은 날은 지난달 1월25일, 매서운 추위가 온몸을 얼음장으로 만들어버린 날의 오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한 시각이었다. 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은 바로 옆에 인왕산에서 이어지는 안산자락이 있어서 그늘이 일찍 드리운다. 이곳은 서대문독립공원 안에 위치하고 있지만, 공원의 대부분 공간을 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 옥사, 기타 관련 시설들이 차지하고 있다. 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은 서대문형무소를 재생시킨 전시 공간이다. 전시의 흐름은 식민지에 항거한 독립운동과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한 민주화 운동의 물결 위에 있다.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그러니까 3.1운동, 상해 임시 정부가 수립되기 2년 전에 일제통감부가 세운 ‘경성감옥’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조선의 감옥이었던 종로의 ‘전옥서’에 수감되어 있던 기결수 500여 명을 이감하는 정도의 규모였으나 3.1운동 때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투옥되면서 포화상태가 되자 공덕동에 새로운 감옥을 지어 그곳을 ‘경성감옥’으로 하고 구 경성감옥은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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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이 되자 서대문감옥의 이름은 ‘서울형무소’로 개칭되었는데, 당시에는 반민족행위자, 친일세력이 대거 수감되었었다. 동시에 김원봉, 김성숙, 여운형 등 민족지도자들이 수감되기도 했다. 그러나 반민특위 활동이 이승만에 의해 탄압받고 좌절되면서 친일파들은 대부분 석방되었고, 1950년 무렵에는 수감자의 70%가 좌익인사로 바뀌는 상황이 발생했다. 전쟁 후 혁명과 쿠데타, 군사독재로 이어지는 격변의 시절에는 조봉암, 조용수 등이 이곳에서 사형당했고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8명의 시민이 억울하게 사형당했다(30년 뒤 재심에서 모두 무죄 선고). 육영수 여사를 암살한 문세광, 박정희 전 대통령을 죽인 김재규도 이곳에 수감되었고 이곳에서 사형당했다. 식민지시대부터 근·현대사의 어지러운 이야기들이 이곳 서대문형무소의 벽돌담장 안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을 본다는 것은 여행을 준비하는 시점부터 다녀온 이후까지 깊은 상념과 여운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시설 그대로 스산하고 춥고, 화나고 미안한 마음

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유구전시실’, ‘취사장’, ‘지하옥사’, ‘공작사’, ‘사형장’ 등으로 나눠져 있다. 모두 옛 서대문형무소의 시설을 그대로 재생한 공간들이다. 출입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눈앞에 보이는 벽돌 건물이 역사관의 중심인 ‘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 상설전시관인 이곳에는 서대문형무소 역사실과 민족저항실이 있다. 관람객의 발을 붙잡는 곳은 역시 민족저항실이다. 이곳은 1, 2, 3관으로 나눠져 있는데, 1관에서는 의병을, 2관에서는 수형표를 만날 수 있다. 의병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언제나 들불처럼 일어섰다. 때로는 침략자를 향해, 때로는 내부의 적들을 향해 거침없는 공격을 가했던 의병들의 활약을 보면, 역시 국가의 주인은 왕이나 정치인인 아닌, 시민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된다. 농사 짓던 사람들이, 고기 잡던 어부들이, 산 속의 벌목꾼들이 저마다 농기구를 내려놓고 무장을 하고, 싸우고, 죽어가며 침략에 저항했던 이야기가 역사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허구가 아닌, 역사적 사실로 이곳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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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을 때도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일어났고, 그들은 조선에서, 또는 망명 정부, 만주, 중국에 모여 무장했으며 끝내 독립군이 되어 조선의 독립을 위해 생을 바쳤다. 그렇게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된 사람들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스러져갔는데, 그분들의 ‘수형기록표’가 민족저항실 2전시실의 벽을 메우고 있다. 5000여 명의 애국지사들의 수형표 앞에 서면 누구나 숙연해지고 가슴이 서늘해진다. 수형표 사진 속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은 당당한 눈빛과 옥고의 흔적이 함께하고 있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이곳에 수감되어 사진을 찍힐 때의 유관순 열사의 심정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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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저항실 3관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를 요약해 놓은 전시관이다. 상해 임시 정부 수립과 활동, 그리고 그 활동 과정에서 투옥된 인사들의 이름과 관련 사진을 만날 수 있다. 군자금 확보를 위한 활약상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20년 1월4일 간도 명동촌 입구에서 철혈광복단원인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최봉설, 김준, 박웅세 등이 일본의 현금 수송마차를 습격, 15만 원을 빼앗아 독립군 무기 구입을 추진하다 체포된 사건, 1929년 서울 망우리 마석고개 근처에서 최양옥, 김정련, 이선구 등 공명단원의 일제 우편차량 습격 사건 등이 그것이다. 당시 체포된 철혈광복단의 여섯 의사 가운데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의사는 1921년 8월2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했고, 공명단원은 모두 징역 10년 등 중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그중 이선옥 의사는 옥사하고 말았다. 1929년 원산 총파업, 1927년 간도항일운동 등 역시 당시 일제에 대한 조선인들의 저항이 얼마나 드세고 치열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심신은 더욱 추워졌다. 전시되어 있는 사진과 문구가 주는 스산함도 있었지만, 난방이 되지 않는 전시관이 추위를 더해주는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 경성감옥 시절이야 인권이고 뭐고 무시되던 상황이니 그렇다 해도, 전시관으로 바뀐 지금까지 난방을 하지 않는 것은 관람객에게 독립운동가, 민주화운동가들의 고난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해 준다는 점에서 당연하고도 기꺼운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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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고문실이 있었다. 독립운동가, 의병, 민주화운동가 등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면 형무소 안에서 조사가 이뤄졌다. 지금은 경찰과 검찰에서 조사를 하고, 재판을 통해 형이 확정되면 교도소에 수감되어 형량대로 생활하는 게 상식이지만, 당시에는 형무소에 아예 조사실을 설치해 조사, 회유, 협박, 고문까지 자행했던 것이다. 지하 고문실에는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 놓은 대기실, 물고문실 등이 있다. 알려진 대로 일제의 고문은 상식과 상상을 초월했다. 기록에 의하면, ‘고문을 받은 독립운동가들은 신체가 부러지고 찢기는 것은 다반사였고, 장기 파열, 허파에 물이 차는 흉막염, 뇌진탕 등의 병마에 시달려야 했다’고 한다. 몸만 망가지는 게 아니었다. 물리적 폭력 외에도 정신적 모멸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심신이 만신창이가 된 독립운동가들은 형무소 안에서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수감 생활을 이어가다 사망하기가 일쑤였고, 죽음 직전에 병보석으로 석방시켜 독립운동가와 그의 가족들을 두 번 죽이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벌어졌던 물고문, 인두고문, 주리 틀기 고문, 벽관 고문(옴짝달싹 할 수 없이 좁은 직육면체 나무 상자에 사람을 넣어 세워두는 고문) 등은 무어라 비판하기조차 끔찍한 악마의 행위였다. 더욱 기가 찬 일은, 일제 시대 때 일본 경찰 하급 관리로 활동했던 친일파 조선인 순사들이 다시 해방된 대한민국 경찰이 되어 일제 때 배운 고문 기술을 독립운동가 출신의 정치인, 사회운동가, 민주화운동가들을 대상으로 그대로, 아니, 더 진화된 기술로 괴롭혔다는 사실이다.

지하 고문실 중앙쯤에 설치된 ‘고문육성증언’ 모니터 앞에 서면 실제로 고문을 당한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의 처철했던 고문 이야기를 육성으로 들을 수 있다. 1920년대 신간회에서 활동한 함귀래 지사는 1935년 3월에 체포되어 1년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는데, 당시 총독부 경찰에게 당한 고문의 고통을 동생 함홍래 씨가 전했다. 이병희 지사는 종연방적에서 노동운동을 이끌다 1936년에 체포되어 2년4개월 동안 옥고를 치루고 1940년에 북경으로 망명, 의열단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그러나 1943년 9월에 다시 체포되어 이육사와 함께 북경 감옥에 투옥되었던 독립운동가이다. 그 역시 당시 당했던 고초를 증언했다. 육성을 전한 이규창 의사는 친일파 이용로를 처단한 독립운동가이다. 징역 13년 형을 언도 받고 수감되었으나 옥중 투쟁 끝에 형기가 늘어나 오랜 세월을 영어(囹圄)의 몸으로 지낸 분이다.

▶중앙사, 11·12 옥사는 기획 전시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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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에서 빠져나오면 눈앞에 옥사가 보인다. 옥사는 말 그대로 감옥 건물이다. 높은 천장, 낮은 감방의 이곳은 높은 곳엔 교도관이, 낮은 곳엔 독립운동가들이 갇혀 있는 구조다. 형무소 전시관이 마치 미술관, 박물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면, 옥사는 말 그대로 감방이 줄줄이 있는 곳이다. 가운데 복도를 사이로 양쪽에 감방문이 있고, 좁은 감방에는 철창문이 덩그러니 오래 전 시간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중앙사와, 11, 12 등 세 곳이 옥사에선 방문 당시 이곳에서는 기획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평화, 함께 가는 길, 당신의 역사를 기억합니다’ 전은 독립운동가, 민주지사들의 족적을 전하는 전시다. 문익환 목사의 감방전 ‘꿈은 가두지 못한다’, 사회운동가 ‘이창복’, 故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유관순 열사,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등의 일생과 그들의 사회 운동, 독립 운동의 스토리를 확인할 수 있다. 감옥사에서 보는 그들의 삶과 죽음을 보면서 오늘의 자유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더욱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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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사 옆에는 ‘공작사’가 있다. 공작사는 1923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수감자들은 이곳에서 강제 노역을 해야만 했는데, 주로 형무소, 군부대, 관공서 등에서 사용하는 물품들을 생산했다. 공작사 안에는 방적기도 설치되어 있어 원단, 의복 생산도 했고, 2차 세계대전 말에는 군수용품도 이곳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중앙사, 11, 12 옥사가 한 건물에 모여있는 것에 비해 9 옥사는 별개의 건물로 독립되어 있다. 9 옥사는 1920년대에 2층 건물로 지어졌는데 일제는 이곳에 주로 정치 사범들을 집중 배치했다. 더욱 철처하게, 가혹하게 감시와 통제를 하기 위함이었다. 공작사 뒷쪽에는 계단이 있고, 그 꼭대기에는 망루와 한센사가 있다. 망루는 수감자들을 감시하기 위한 시설이고, 한센사는 수감자 중 한센병에 걸린 사람들을 수용하는 시설이었다. 난방이 전혀 되지 않는 다른 옥사와는 달리 이곳에는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다.

마당에는 격벽장이 있다. 원래는 수감자들이 운동하는 곳인데, 이름이 격벽장이 된 것은 ‘벽을 쳐 놓고 격리 운동을 시키겠다’는 의도가 담긴 공간이기 때문이다. 벽이 없어도 결코 넓다고 말할 수 없는 마당에 벽을 세웠고, 수감자들은 그 벽 사이에서 운동을 해야만 했다. 저렇게 좁은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이란 왔다 갔다 걷는 정도? 강점기 일제의 비인륜적 만행은 과연 어디까지 이어질까. 격벽장 뒷쪽으로는 원형의 ‘순국선열추모비’가 있다. 전시관과 고문실, 옥사, 공작사, 한센사, 격벽장 등을 살피며 이곳까지 왔다면 누구나 추모비 앞에 발을 멈추게 된다. 고개를 들어보니 공원 구석에 키 높은 나무 한 그루가 겨울 오후의 세찬 바람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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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의 나무’라고 명명된 30m 높이의 미루나무가 심어진 것은 서대문형무소에 ‘사형장’이 건립된 1923년의 일이었다. 나무는 사형장 바로 옆에 있다. 처음엔 어린 나무였지만 훗날 우뚝하게 자란 뒤에는 사형장 앞에 선 사형수들이 잠깐 발길을 멈추고 이 나무 옆에 서서 눈물을 흘리곤 했다고 한다. 특히, 독립운동과 독재항거에 일생을 바쳤던 지사들이 억울하게 사형을 당할 땐 이 나무를 붙들고 통곡을 한 뒤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사형장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사실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교수형 집행을 위한 마루판과 교수줄, 개패식 마루판을 내리는 레버 등이 있고, 교수형 장면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는 참관석이 있다. 교수형을 당한 사형수는 지하 일층에서 사망 확인 작업을 한 뒤 수습되어 바로 뒤 ‘시구문’을 통해 가족에게 전해졌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조작된 간첩 사건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희생양으로 대법원 확정 판결 직후 사형이 집행되었던 사람들은 강제 화장된 후 한 줌의 재로 전달되기도 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살펴보는데 걸린 시간은 약 두세 시간. 독립 공원에 포함되어 있는 독립문, 독립선언기념탑, 서재필 동상, 독립관까지 둘러보려면 30분 정도 더 잡아야 한다. 물론 집중도에 따라 하루 종일 걸릴 수도 있다. 여행지로서는 결코 넓다고 할 수 없는 서대문독립공원. 그러나 서대문형무소에서 고통받은 독립운동가, 사회운동가들의 활동 영역, 희생의 깊이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하다. 민국 100주년, 3월이 오면, 꼭 찾아볼 그곳, ‘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이다.

[글 이영근(여행작가) 사진 안동수(다큐PD)]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68호 (19.03.05)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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