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사원 입구에 있는 연못. ‘똬리를 튼 뱀’이란 뜻의 이 사원은 석가를 위해 지어졌다. 네악 페안. (우)반티 스레이 사원. ‘여자의 성(城)’이라는 뜻의 이 사원은 ‘크메르 예술의 극치’이며 ‘크메르의 보석’이라 불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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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속에서 순환하는 만다라
영어 울렁증이 심해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해외 여행 한 번 나가지 못했다. 그러다 마흔 살이 되자 생각이 뒤집어졌다. 용기가 생겼다고 할까? 불경기를 심하게 타고 있는 회사에 보탬이 되고자 스스로 사표를 정중히 제출하고 여행 상품을 뒤졌다. 패키지 여행에 대한 단점들을 들은 터라 자유 여행을 찾아봤지만, 역시 두려움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영어가 되지 않았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심이 몰려왔다. 안전하다고 생각한 패키지 여행 상품을 골랐다. 그리고 베트남 할롱 베이와 앙코르 와트가 묶인 상품을 선택했다. 그렇게 첫 해외 여행이 시작되었다. 베트남 할롱 베이를 거쳐 앙코르 와트가 있는 시엠레아프 공항에 도착했을 때 순간 멈칫했다. 시엠레아프이라는 땅에 첫발을 내디딜 때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훅 하고 들어왔다. 이런 것을 운명이라고 하는 것일까. 첫사랑을, 운명의 인연을 마주하면 전율이 인다고 하는데…. 아, 그런 전율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엠레아프 공항에 처음 내렸을 때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캄보디아만이 가지고 있는 흙냄새를 맡았던 것 같다. 앙코르 와트에 가면 묘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처음에는 이것이 무엇일까 궁금해 하면서 뭐라 딱 부러지게 잡히지 않는 것이 있다. 나중에야 알았다. 이곳의 시간은 천천히 흐르고 있다는 것을. 단지 차들이, 오토바이들이 느리게 움직이기 때문이 아니다. 느리지만 그들만의 질서가 있고, 그 질서는 마치 완벽한 만다라의 순환처럼 그들의 삶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동할 때마다 버스 창밖으로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판자로 엮은 시커먼 집들이 띄엄띄엄 보였다. 그 집들에는 알록달록한 꽃이 핀 화분들이 놓여 있었다. 세계 최고의 빈민국에 속하는 캄보디아. 그러나 그들의 행복 지수는 세계 10위 안에 든다고 한다. 삶이 넉넉하지 않아도 그들은 꽃과 화분을 키우고 있었다. 그들이 행복한 이유는 무엇일까. 상대방이 새로운 물건을 하나 사서 자랑하면 그들은 정말 좋겠다는 표현을 한 뒤 바로 ‘나는 그것 없이도 행복해’ 하며 뒤돌아 선다. 자신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 물질에 욕심내지 않는 것. 그것 없이도 충분히 살고 있고, 살 수 있으며 또 행복하다는 것. 어떻게 보면 이런 질투와 시기, 욕심, 욕망이 없어서 빈민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들에 내 안의 행복을 저당 잡힌다는 것을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짧지만 큰 여운이 남은 앙코르 와트 패키지 여행을 마쳤다. 그리고 일주일, 열흘 정도 시간을 내서 위대한 크메르 제국이 이룩한 앙코르 문화를 다시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유럽이나 다른 선진국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일주일, 열흘 정도의 휴가를 낼 수가 없다. 눈치에 눈치를 보며 짧게 틈틈이 앙코르 땅을 몇 번 밟았다. 유적지를 어느 정도 탐닉하고 나자 이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이번에는 제대로 그들의 삶에 녹아 들어 보기로 했다. 어렵게 들어간 회사에 다시 사의를 표한 하얀 봉투를 떨리는 손으로 내밀었다. 계획은 이랬다. 한 달, 딱 한 달만 살자. 나는 그들을 만나고 싶었다. 크메르 민족을, 위대한 자야바르만의 후예들을, 그리고 가슴 깊이 미소 짓는 그들의 삶을.
(좌)앙코르 톰의 부조. 앙코르 톰은 불교 사원이지만 춤추는 무희 압사라를 부조로 새겨 놓았다.(우) ‘위대한 도시’라는 뜻의 앙코르 톰은 하나의 거대한 도성이다. 성곽은 히말라야 산맥을, 해자는 우주의 바다를 나타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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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앙코르 와트. ‘도시 사원’이란 뜻으로 수리야 바르만 2세가 지은 사원이다. 건축학적, 미학적, 종교적 상징성이 세계에서 최고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바이온.‘관세음보살의 얼굴’이라고도 하고, 위대한 왕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이라고도 한다. 캄보디아를 대표하는 ‘앙코르의 미소’로 불린다, 프레아 칸은 ‘신성한 검’의 뜻을 가진 사원이다. 자야바르만 7세가 아버지를 위해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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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과 휴식의 최적지
각자 원하는 여행이 다르다. 누군가는 액티비티를 즐기고, 누군가는 편안한 휴식이 보장된 호캉스를 누린다. 또 누군가는 역사와 문화 탐방을 위해 집을 나선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앙코르 와트는 최적이다. 우선 해외 장기 여행을 위해서는 비자가 중요하다. 무비자거나 관광 비자로 장기 체류가 가능해야 한다. 캄보디아는 관광 비자(30달러)로 30일 동안 체류할 수 있다. 앙코르 와트는 관광 도시인 만큼 숙박 시설이 잘 되어 있다. 배낭족들을 위한 호스텔부터 비즈니스 호텔, 리조트, 콘도 등 여행 목적에 맞는 다양한 숙박 시설이 즐비하다.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심신이 지쳤다면 몇 날 며칠씩 호텔 밖으로 한 발도 나오지 않아도 된다. 식사와 수영장, 스파, 헬스장, 마사지, 캄보디아 전통 음식 만들기(배우기) 등 숙소에서 즐길 프로그램이 많다. 역사와 문화가 궁금하다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앙코르 유적지를 둘러보면 된다. 입장료는 1일권(37달러)과 3일권(62달러), 7일권(72달러)이 있다. 3일권은 일주일 사이에 아무 때나 세 번 입장이 가능하고, 7일권은 한 달 동안 아무 때나 일곱 번 입장이 가능하다. 7일권을 끊고 나서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면 앙코르 티켓 없이도 갈 수 있는 외곽의 유적지를 찾으면 된다. 프놈 쿨렌(20달러)이나 벵 메알레아(5달러), 동양 최대 호수 톤레사프 등은 앙코르 티켓과 별개로 입장료는 받는다. 이렇게 유적지를 다 돌고 나면 시티 투어를 해 보는 것도 좋다. 패키지 여행에는 없는 곳들을 찾아서 돌아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국립박물관과 민속촌, 앙코르 파노라마박물관과 전쟁박물관을 거쳐 현지인과 툭툭 기사들도 잘 모르는 팀스하우스(캄보디아 현대 화가)와 디우 갤러리(캄보디아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프랑스 사진작가), 쿡착(버려진 사원), 앙코르 미니어처(캄보디아 장인) 등을 찾아 다니다 보면 어느새 그들과 한층 가까워져 있다. 그리고 저녁에는 다양한 공연을 관람하는 것도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 압사라 춤 공연(12달러)은 뷔페 식당에서 열리기 때문에 식사와 공연 두 가지를 모두 즐길 수 있다. ‘앙코르의 미소(Smile of Angkor)’는 캄보디아 대표 공연으로, 유네스코 무형문화재에 등재된 공작새 춤 공연도 포함되어 있다. 땀을 흘리고 활동적인 것을 원한다면 짚라인(59~99달러)과 사이클링을 할 수도 있다. 자로 잰 것처럼 완벽한 앙코르 와트의 만다라를 보고 싶다면 열기구(20달러)나 헬리콥터(90달러 이상)를 타고 앙코르 상공을 비행하는 것도 다양한 시각에서 앙코르를 조망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혼자 가도 좋고, 성향이 맞는 사람과 가면 더 좋고, 혹은 여행 취향이 다른 사람과 가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각자가 원하는 방식대로 앙코르를 즐기면 되니까. 대신 아는 만큼 보이는 것처럼 가기 전에 철저하게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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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용과 시간의 효율적 관리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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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품 파는 만큼 좋은 숙소를 구한다
앙코르 와트에는 1000여 곳이 넘는 숙소가 있다. 그만큼 시설도 제각각이고,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어느 특정 지역이 시설과 가격이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다. 하루에 100달러를 호가하는 호텔 바로 옆에 10달러밖에 하지 않는 호스텔이 나란히 있다. 자신에게 맞는 숙소를 찾기 위해서는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다. 나는 숙박비를 최소한으로 잡았다. 10∼20달러 수준으로 낮췄다. 그보다 더 싼 곳도 있지만 그런 곳은 치안과 소지품 분실이 걱정됐다. 발품을 팔아 알아본 바로는 한 달에 300∼500달러 하는 아파트들도 있었다. 달랑 원룸만 빌리는 곳은 약 300달러, 투 룸에 화장실이 두 개인 곳은 전기세와 수도세, 세금은 별도면서 500달러. 시내에 새로 지은 아파트는 24시간 경비가 있고 수영장도 있다. 이곳도 한 달에 500달러다. 한 달로 계산하지 않고, 호텔처럼 운영되는 아파트도 있다. 아파트의 장점은 독립된 출입구가 있고 조리 시설이 있다는 것이다. 단점은 수도세, 전기세, 세금을 따로 계산해야 하며, 매일 청소를 해 주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몇 개월 머물고 싶었지만 관광 비자가 허락하는 날짜는 30일이다. 30일 동안 아파트에 갇혀 청소며 빨래를 직접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국에 있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파트 대신 호텔 같은 숙박 시설을 선택했다. 나는 이번 여행을 초반, 중반, 후반 이렇게 세 구간으로 나눴다. 초반에는 정보 수집, 중반에는 해결해야 할 업무 진행 및 시티 투어, 후반에는 휴식으로 여행 주제를 나름 나눠 봤다. 그래서 초반에는 시내에 있는 숙소(15달러)로 잡았다. 중반은 시내와 떨어진 한적한 곳(20달러)으로 수영장이 있고 주변이 조용한 곳을 선택했다. 후반 숙소(15달러)는 걸어서 시내를 왕복할 수 있는 거리로 시엠레아프 강가에 있는 곳으로 결정했다. 한곳에 머무는 것도 좋지만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올까 싶어서 숙소를 옮기며 다양한 지역에 살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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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감 없는 세계 음식 집산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간식은 룸빵과 찹쌀떡이다. 룸빵은 샌드위치인데 햄, 치즈, 양파 등 안에 들어가는 재료를 선택할 수 있다. 한 가지 팁을 준다면 생파가 들어가는데 그것은 빼는 쪽으로 추천하고 싶다. 많이 맵다. 이 밖에도 캄보디아 치즈와 도넛, 대나무 밥 등이 있다. 길거리에서도 팔고, 유적지에서도 팔고, 시장에서도 판다.
처음 맛보는 음식들이 서서히 싫증나기 시작하면 진한 한식이 떠오른다. 시원한 김치에 삼겹살, 얼큰한 김치찌개와 된장찌개. 한인 타운에는 한식당이 많다. 한국식 횟집과 치킨집, 중국집도 있다. ‘대박식당’은 배낭족들에게는 성지 같은 곳이다. 배고픈 배낭족들을 위해 무제한 삼겹살(6달러)을 제공하면서 유명해졌다. 이전에는 펍스트리트 근처에 있었으나 지금은 타라 앙코르 호텔 찻길 건너로 건물을 지어 이사했다. 최근에는 프놈펜에도 체인점을 오픈했다.
물 축제 기간 중 보트 레이스를 하는데 남자부, 여자부, 유소년부로 나뉘어서 3일 동안 진행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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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와트에서 볼거리, 즐길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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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나 부부와 꼬마 꾼
낯선 곳에서 만나는 인연은 경계심과 설렘을 동반한다. 그런데 앙코르에서 스치는 인연은 경계심과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더 많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입가에 웃음이 멈추지 않았고 작은 질문에도 친절히 설명해 주었으며 어려움이 닥쳤을 때는 몸소 해결해 주려고 했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중 비스나 부부와 꼬마 꾼을 잊을 수 없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장남인 비스나는 한국에서 14년 동안 일하면서 동생들의 대학 공부와 결혼을 모두 책임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결혼을 했다.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14년이란 시간이 그에게는 무척 고단했을 텐데 가족들을 위해 굳건하게 버텼다. 캄보디아로 돌아와 한국어 가이드 시험에 합격했고, 승합차를 샀다. 그리고 어여쁜 배우자를 만났다. 꼬마 꾼은 기타리스트가 꿈이다. 아직 서툴지만 기타를 볼 때면 꾼의 눈은 반짝였다. 그리고 기타를 연주하면 꾼은 기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때 꾼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들이 고였다. 외로움과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무게감이 가득했다. 절대 고독이라고 누가 얘기했었나. 무표정인 꾼의 얼굴에는 헤아릴 수 없는 고독의 물결이 잔잔하게 출렁였다.
(좌)T갤러리는 시엠레아프에 있는 면세점으로 공항 면세점보다 싸다.(우)자전거를 타고 앙코르 와트로 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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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나’를 만나는 시간
앙코르에서의 시간은 내가 쓰는 만큼 빠르게 흐르기도 하고, 느리게 머물기도 한다. 오직 나를 위한 나만의 시간과 마주했다. 인생에 내 시간의 주인이 되어 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앙코르에서 내 시간의 주인은 나였다. 내 의지로 내 시간을 디자인하고 인테리어하면 되었다. 그 모습이 아름답든 흉측하든 내가 즐거우면 되니까. 내가 내 시간의 주인이니까. 아쉬운 점은 시간이 모자랐다는 것이다. 좀 더 머물렀다면, 좀 더 그들의 삶에 녹아들었다면…. 아직 가 볼 곳이 많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많고, 궁금한 것들도 많다. 앙코르 와트가 있는 시엠레아프주를 벗어나 프레아 비히어 사원도 가 보고 싶고, 소수 부족이 살고 있는 마을도 방문해 보고 싶으며,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이름 없는 유적지를 탐험해 보고도 싶다. 앙코르 와트는 영국 BBC가 선정한 ‘죽기 전에 꼭 가 봐야 할 여행지’다.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그들을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위대한 제국 크메르와 자야바르만 후예들이 숨 쉬고 있는 앙코르 와트에서의 한 달은 그동안 잊고 있던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여행의 즐거움 중에 하나는 생소한 곳에서 ‘나’를 발견할 때일 것이다. 한 달 동안 장기 여행을 하면서 고단했던 지난 생활에 치여 놓고 있었던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살면서 잃어버린 무언가가 있다면 과감히 여행 가방을 싸 보면 어떨까. 목적지가 앙코르 와트라면 더없이 좋다.
[글과 사진 황병욱(여행 작가, 『앙코르 와트에서 한 달 살기』 저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69호 (19.03.12)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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