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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납치 사건 모든 단서는 전화기 너머 소리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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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더 길티>

주인공 근무 112콜센터에 걸려온

긴급한 납치 구조요청 전화

밀폐된 공간에 배우도 한명뿐

전화통화만으로 이야기 전개

섬세한 사운드 연출 기법 뛰어나

소리로 상상하게 하는 색다른 영화

관객 선입견 뒤엎는 반전 압권

반전뒤 떠오르는 유의미한 질문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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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더 길티>의 이야기 자체는 단순해 보인다. 경찰인 주인공 ‘아스게르’(야코브 세데르그렌)는 112콜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는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듯, 기자한테서 걸려온 전화에서 “내일 있을 재판에 대한 코멘트”를 청하는 질문을 받고는, 퉁명스럽게 전화를 끊는다. 무슨 일인지 그와 동료들 사이에서도 뭔가 불편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

그러던 중 그는 한 여성(‘이벤’, 제시카 디니지의 목소리 연기)의 전화를 받는다. 아이에게 전화를 하는 것을 가장한 그 전화는 납치를 당하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구조 요청 전화다. 납치 용의자는 그 여성의 남편으로 밝혀지고, 아스게르는 즉각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그리고 여성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집에 남겨져 있는 그녀의 아이와 통화를 하며 엄마를 꼭 돌려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러면서 그는 콜센터 요원에게 허용된 것 이상으로 점점 사건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이하 생략.

자유 대신 선택한 제약들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이 사건을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많은 데뷔작(이 영화는 구스타브 묄레르 감독의 데뷔작이다)이 그러하듯, 이 영화는 자유 대신 제약을 선택한다.

영화가 스스로에게 허용한 기초재료는 다음과 같다. ①공간: 112콜센터 내부, 즉 그다지 넓지 않은 방 두개짜리 실내 공간이다. ②화면에 등장하는 인물: 보조역 배우들을 빼면 단 한명, 콜센터 요원 ‘아스게르’뿐이다. ③카메라: 카메라는 콜센터 실내를 한번도 떠나지 않는다. ④대사 및 사건: 대사와 사건의 98%가량은 아스게르와 누군가의 전화 통화를 통해 전개된다. 더구나 ⑤시간: 이 영화의 시간은 사건 진행 시간과 거의 일치한다.

이러한 설정은 감독이자 각본가인 구스타브 묄레르가 이 영화의 아이디어를 얻게 된 체험, 즉 1999년 미국에서 있었던 납치 살인사건 피해자의 경찰 통화 녹음기록을 들었을 때의 몰입 경험을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겪게 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다. 좀 멀게는 조엘 슈마허 연출, 콜린 패럴 주연의 <폰 부스>나 라이언 레이놀즈 주연의 <베리드>, 가깝게는 톰 하디 주연의 <로크>로 이어지는 법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전형적인 ‘밀폐 공간, 전화 통화 무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설정의 성패는 결국 ①성냥 한 갑에 칼 한 자루만 준 채 출연자를 무인도에 던져 넣는 ‘서바이벌 다큐’스러운 기교적 게임에 머무는가, 아니면 ②튀는 설정을 충분히 이유 있는 영화적 장치로 납득시킬 만큼의 설득력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는가, 또 아니면 ③기발함이나 참신함을 넘어서는 성찰이나 울림 또는 질문을 남기는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는가 하는 데 달려 있을 것이다.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소리는 이 영화에서 절대적인 요소다. 사건의 내용은 물론 그를 둘러싼 모든 디테일은 헤드셋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묘사된다. 예컨대, 와이퍼 소리는 곧 통화 상대방이 차 안에 있고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는 상황이며, 점점 커져오는 사이렌 소리는 곧 통화하고 있는 사람에게 순찰차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상황이다, 등등.

심지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는 ‘북~’ 긁는 소리나 휴대폰을 손에 들고 움직일 때 나는 덜그럭거리는 소리 같은 잡음도 이 영화의 상황 묘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상황에 따라 특정 소리를 강조하고 특정 소리는 누르는 이 영화의 섬세하고도 탁월한 사운드 편집, 믹싱은 관객들로 하여금 거의 상황을 보는 것처럼 세밀하게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사운드는 주인공 아스게르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에도 충분히 활용되고 있다. 예컨대 아스게르가 구조 요청자인 이벤을 진정시키며 그녀의 일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주위의 소리는 전부 뺀다든지, 아스게르가 근무 중에 완전히 다른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발포 비타민의 거품 소리만 남긴다든지 등의 사운드 연출은, 영화가 그야말로 ‘사이트 앤 사운드’(Sight and Sound)임을 새삼스레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사운드가 그러는 동안 사이트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저 아스게르를 바라만 보고 있는가?

일반론의 위험을 감수하고 말한다면, 영화에서는 보통 화면이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정보 전달’의 기능을 담당하고, 소리가 ‘정서적, 무의식적 느낌 전달’의 기능을 담당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더 길티>에서 이 둘은 서로 역할을 뒤바꾸고 있는 형국을 취한다.

아스게르의 귀를 화면 가득 보여주는 첫 장면의 익스트림 클로즈업부터, 아스게르의 전신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의 롱숏까지, 영화는 다양한 숏(피사체와의 거리)들을 사용해서 아스게르의 심리 상태를 드러낸다. 동시에, 영화의 시간 진행이 ‘실시간’이기에 완급 조절 또한 주로 숏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러한 연출과 편집은 일면 영화학교 교과서풍의 고지식한 맛이 없진 않다만, 어쨌거나 이 영화를 보는 흥미진진한 포인트 중 하나가 되어준다.

더불어 현재 통화 중임을 표시하는 빨간 램프(이는 청회색이나 남색이 주조색인 화면에서 단연 눈에 띈다)라든지, 결혼반지(아스게르는 아내와 헤어졌음에도 여전히 결혼반지를 끼고 있다)라든지, 개인 휴대폰(아스게르가 업무에서 업무용 전화 대신 개인 휴대폰을 쓰는 행동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같은 소품 등을 이용한 캐릭터 및 정황 묘사도 또한 이 결박 탈출 묘기 같은 영화의 무시할 수 없는 재미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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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이 전부가 아냐

그런데 어쨌든, 우리가 이 영화의 사건을 보는 방식은 귀를 통해서다. 그리하여 헤드셋을 낀 아스게르가 그러는 것처럼 관객들 또한 납치된 여성 이벤, 그녀의 남편 미켈, 그녀의 딸 마틸드 같은 인물을, 그들의 말과 말투와 목소리를 통해 상상하고 판단하게 된다.

이벤은 절로 연민이 갈 법한 목소리에 겁에 질려 울먹이고 있고, 반면 그녀 남편의 목소리는 정반대로 거칠고 무뚝뚝하고 말수 또한 적다. 게다가 전과기록까지 있다. 아이는 왠지 겁을 잔뜩 먹은 듯 머뭇머뭇거리고, 아빠가 엄마에게 소리를 지른 뒤 집에서 나갔다고 얘기하는 등등, 통화를 통해 상상되는 전후 상황은 빤하다.

하지만 이 상상의 과정은 우리의 상상의 허점과 사각지대를 드러내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스포일러 우려로 상세한 말씀은 드릴 수 없겠으나, 영화는 모든 상황을 뒤집는 한마디를 통해 우리의 선입견과 성급한 확신을 여지없이 뒤집는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견고한 확신은 선입견이었음이, 우리의 명징한 논리는 성급한 넘겨짚기였음이 밝혀진다. 이 경험은 조각난 정보와 단편적 이미지들을 재료로 더할 나위 없이 확고한 결론을 내는 데 익숙한 우리들에게 충분히 강렬하고 충분히 쓸모 있는 경험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한 공간 한 인물이라는 족쇄를 채운 <더 길티>의 설정은 충분한 설득력을 얻는다.

하지만 아무리 양질의 반전이라도 반전의 의외성에만 의존하는 영화는 결국 정답을 알고 나면 용도폐기되는 일회용 게임에 가까워지는 법. 이 또한 스포일러 우려로 인해, 안타깝게도 상세한 말씀을 드리긴 어렵겠지만 <더 길티>의 진정한 핵심은 이 반전이 드러난 이후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인물이 던지는 대사 한마디로, 개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시스템의 영혼 없는 얼굴을 마주치고, 그런 무표정한 보신주의로부터 한참을 벗어나 위험할 정도의 월권을 감행하는 아스게르를 보게 된다. 그 절정에는 자신의 미래를 완전히 바꿔버릴지도 모를 선택을 하면서까지 한 생명을 구하려는 그의 필사적인 노력이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그런 아스게르의 ‘인간적 행동’의 밑바닥에 깔려 있던 죄책감을 정면으로 마주치게 된다.(이 영화의 제목이 어째서 <더 길티>였는지를 드디어 알게 되는 순간이다.)

그리하여 영화 종료 후 우리 손에 쥐어지는 것은 매끈하게 클리어 된 게임의 게임 오버 메시지가 아니라 질문들이다. 아스게르의 노력은 ‘그들’을 위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자신의 죄책감을 씻기 위한 것이었는가? 안전하고도 냉정한 국가시스템의 ‘합법’이 아스게르의 위험하고 인간적인 ‘월권’을 벌할 자격을 가지고 있는가? 정의와 불의를 나누는 경계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만큼 뚜렷한가? 이런 질문들이, 거창한 설교나 허세 가득한 무게 잡기나 있는 체하는 난해함 없이도 자연스럽게 수면 위로 떠오른다.

반드시 많은 것들이 있어야만 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놀라운 데뷔작.

한동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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