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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2 (토)

[청소년 낙태 리포트] 만17세때 중절경험 청소년활동가의 편지…“낙태에 대한 낙인·차별로 너무 힘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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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과 중절은 누구에게나 있을수 있는 일

청소년도 성적인 삶의 주체로 존중받아야

헤럴드경제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는 라일락 씨. [정세희 기자/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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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현재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는 23세 라일락입니다. 라일락은 제 활동명이에요. 청소년인권행동 시민단체 ‘아수나로’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제 얘기가 임신 청소년에게, 임신중절을 경험한 청소년에게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용기를 냅니다.

제가 임신을 했을 때는 우리 나이로 19세, 만으로는 17세였어요. 당시 애인과의 관계에서 임신이 됐어요. 그때 저는 집을 나온 상태였죠. 피임약을 먹고 있었어요. 임신을 원한 건 아니었거든요. 그러다 이틀인가 사흘인가 바빠서 피임약을 못 챙겨 먹었는데, 어느 날 생리가 멈추고 젖꼭지가 아픈 증상이 생겼어요. 혹시나 하고 방문한 산부인과에서 임신 3~4주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죠.

예상하지 못했던 임신이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웠어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전혀 몰라 그저 인터넷 검색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죠. 물론 아이를 낳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되는 순간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청소년 미혼모에 대한 차별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경제적으로 아이를 안정적으로 양육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어요.

하지만 수술해줄 병원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처음 임신 진단을 받은 산부인과는 “보호자가 없으면 수술해줄 수 없다”고 했어요. 제가 사는 지역의 여러 산부인과에 방문했지만 모두 청소년이기 때문에 보호자 동의가 필요하다며 거절했어요. 이렇게 여러 곳의 병원을 헤매는 데만 1~2주가 흘러가버렸어요. 결국 우여곡절 끝에 수술을 받았어요. 수술만 하고 나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지만 몸이 안 좋아졌어요. 허리 통증과 질염 증상이 생겼어요. 임신중절이 현행법상 범죄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료를 받으러 간 병원에서 솔직하게 수술 경험을 이야기하기가 어려웠어요.

돌이켜보면 저도 한동안 임신중절에 대해 스스로에 대한 낙인으로 많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임신중절은 잘못된 거야’라는 인식이 제게도 있었기 때문이에요. 특히 중학교 때 학교에서 보여준 낙태 동영상이 생각났어요. 여학생들만 음악실에 모아두고 임신 후기의 태아를 낙태하는 영상이었어요. 그때 학생들은 소리지르면서 무서워했어요. 생각해보면 그때 그 영상을 보여주는 이유가 ’낙태는 죄이고, (특히 여성은) 문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심어주려는 것 같아요. 저 역시 임신중절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임신 중절과 관련된 일련의 경험을 겪는 동안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제대로 털어놓지 못했어요.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니까 우울증이 심해지더라고요.

임신중절 후에도 1년 정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다가, 결국 애인의 무책임함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친한 친구에게 털어놨어요. 근데 그 친구가 제 이야기에 너무 공감을 잘 해줘서 거기에서 용기를 얻어 주변의 다른 친구들에게도 말하기 시작했죠. 친구들에게 털어놓기 시작하면서 점점 용기가 생겼어요. 활동하는 청소년 단체의 신문에 ‘청소년으로서 경험한 임신과 임신중절’ 인터뷰를 하며 저의 경험을 사회에 알렸습니다. 여성단체의 ‘임신중절 당사자 말하기 모임’에 참여하면서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을 만나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어요.

캐나다에서 1년 산 적이 있어요. 캐나다는 임신중절이 1980년대에 합법화됐대요. 거기서는 임신중절 클리닉을 청소년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어요. 한국도 임신중절에 대한 낙인과 차별이 없었다면 그때 그렇게 힘들진 않았을텐데 하는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 들었어요.

완벽한 피임은 없어요. 임신과 임신중절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청소년도 똑같아요. 청소년도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중요해요. 아직 우리 사회는 낙태나 성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 청소년들은 미성숙하거나 순수해야 한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청소년들이 성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성적인 삶을 누리고 있을 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죠. 특히 여성 청소년에게는 더욱요. 저는 그런 시선과 편견이 없어져야 하고 청소년이 성적인 주체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보낸 그해 겨울처럼 시리고 외로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위해 앞으로도 싸워나갈 겁니다. 임신중절을 경험한 청소년에게, 그리고 과거의 저에게 말하고 싶어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고, 절대 그 일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 이 글은 청소년기에 임신중절을 경험한 여성의 인터뷰를 편지글 형식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정리=정세희ㆍ성기윤 기자/skysu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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