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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배계규 화백의 이 사람] 독립 염원에 임정 경비원 자청한 백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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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그림= 배계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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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100년 전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된 1차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공포됐다. 3ㆍ1 운동의 열망을 담아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임을 선포한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 문서다.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라고 명기해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의 뿌리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임시정부의 중심에는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1876-1949) 선생이 있었다. 그는 1919년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중국으로 향해 임시정부 초기 청사의 경비원을 자청하며 궂은 일을 도맡았다. 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는 최근 낸 책 ‘100년의 헌법’에서 “김구는 가장 낮은 위치에서 독립에 헌신했다”고 평했다. 김구 선생의 호 ‘백범(白凡)’은 ‘백정(白丁)’과 ‘범부(凡夫)’에서 한 글자씩 따 온 것이다.

김구 선생이 열망한 독립의 꿈은 그러나 온전히 실현되지 않았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국과 옛 소련의 갈등으로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쪼개졌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결정되자 김구 선생은 협상으로 분단을 막아 보겠다며 평양으로 향했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구차한 안일을 위해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않겠다.” 그러나 북측과의 교섭은 무위로 끝났고, 그는 “김일성에게 이용만 당했다”며 공격 받았다. 그는 뜻을 꺾지 않았다. 외세를 배격한 민족자주 통일을 계속 주장했다. 그것이 한반도의 진정한 독립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어지러이 걷지 말라/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이/뒤에 오는 사람에게 이정표가 될 것이니.” 김구 선생의 애송시였던 서산대사의 ‘답설(踏雪)’이다. 분단된 나라의 건국보다 한반도 통일을 소망했던 민족주의자 김구 선생의 꿈은 민족의 이정표로, 언젠가는 이루어질 꿈으로 남았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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