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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여성소방관 채용시험, 차별일까 역차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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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뉴스분석 왜

여성소방관도 산불 현장에서 활약

유튜브 등 “여자는 쉬기만” 희화화

남성보다 낮은 체력시험 기준 논란

체력기준 낮은 대신 5% 정도만 뽑아

경쟁률 훨씬 높고 필기점수도 큰 차이

“채용 문 넓히고 강한 역량 요구해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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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의도 면적의 6배(1757여㏊) 넘는 산과 들을 태웠다는 강원도 산불이 시작됐던 지난 4일 저녁, 중앙119구조본부 영남119특수구조대 신민지(34) 대원은 오후 8시께 출동 지시를 받았다. 야간 근무를 하던 신 대원은 물탱크와 소방 호스가 있는 펌프차를 타고 강원 고성군으로 출동했다. 상황은 긴박했다.

“동료들과 무전을 하면서 6시간 걸려 화재가 난 산까지 올라가는데, 100㎞ 전 아주 멀리서부터 탄 냄새가 진동을 했어요. 바람은 태풍 같이 어마어마했고요. 이웃집이 모두 타버린 동네에서 할머니가 걸어오셔서 ‘도와달라’고 하셨어요. 제가 현장에 와있는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이틀 간의 진압을 마치고 대구에 있는 사무실에 돌아온 신 대원은 9일 <한겨레>와 통화에서 화재 현장을 다시 떠올리며 “현장에서 이틀 밤을 꼬박 샜다”고 말했다. 온몸에 감도는 긴장감 탓에 졸리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고 한다. 밤엔 앞이 잘 보이지 않는데다 이미 꺼졌다고 생각한 작은 불씨가 태풍 같은 바람에 되살아날까봐 불길을 잡고서도 조마조마했다. 이토록 거대한 산불은 신 대원도 처음 겪었다. 2011년 소방관이 된 지 8년만의 일이다. 공장 화재 때 이보다 화력이 더 센 불은 본 적이 있지만, 이번 산불은 워낙 넓은 지역을 집어 삼켰다. 20년차 가까운 소방관 선배들도 “‘대응 3단계’(전국적 화재에 최고 수준으로 대응하는 것)는 처음이야”라고 말할 정도였다.

신 대원에겐 산불을 진압하는 고된 업무 외에도 신경 쓸 일이 하나 더 있었다. 화장실 문제다. 남성 대원들은 사람 없는 야산에서 급한 볼일을 해결하기도 했지만, 신 대원은 그럴 수 없다. 한 지역 산불을 진압하고 다른 지역으로 펌프차를 타고 이동할 때, 지나가다 편의점이 나오면 그는 “화장실 들렀다 갑시다”라며 펌프차를 잠깐 세운다. 신 대원은 “같이 이동하는 대원들한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물도 웬만하면 많이 안 먹는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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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서 여성 소방관 조롱·희화화

강원도 산불과 비슷한 시기인 지난 4일부터 9일 사이 충남 아산 설화산에도 산불이 났다. 화재 현장에서 활약하는 소방관들의 모습이 인스타그램 등에 올라와 호응을 얻었다. 진압 현장엔 여성 소방관도 출동했다. 불길을 진압한 뒤 동료들과 도시락을 먹는 모습에 응원 댓글도 많이 달렸다.

하지만 한쪽에선 여성 소방관을 희화화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유튜브에선 ‘여성 소방관이 줄어야 하는 이유’ 동영상에 가면을 쓴 유튜버가 출연해 “불 끄러 가는 것 왜 남자만 하고 여자 소방관은 쉬느냐” “소방 호스도 못드는 여자 소방관을 왜 뽑냐”, “여자 소방관은 소방관이 아니라 방관이다” 등의 발언을 했다. 청와대 청원게시판에도 “‘월급루팡’ 여성 소방관 퇴출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와 있다.

여성 소방관들은 남성 소방관들과 똑같이 화재 현장에 출동해 진압 업무를 벌인다. 그럼에도 이런 논란이 일어나는 것은 여성 소방대원 비율이 적어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남녀의 기준을 다르게 둔 소방관 채용 체력시험이다. 현재 청와대 청원게시판엔 “군인, 경찰, 소방관 채용시험에서 체력시험 기준을 동일하게 해달라”는 청원글이 여러 건 게시돼 있다. “육체적 역량이 중요한 직종의 공무원을 채용할 때 여성 지원자에게 요구하는 체력기준이 남성에 비해 지나치게 느슨해서 남성 지원자들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소방공무원 체력시험에서 여성에게 요구하는 기준은 남성보다 낮은 편이다. 소방공무원임용령을 보면, 소방관 체력시험은 총 6개 종목을 10점 만점으로 해 평가하는데 여성 지원자에겐 남성 지원자의 55~80% 수준 역량만 요구한다. 예를 들어 상체 근력을 측정하는 악력의 경우 남성은 손에 60㎏을 넘게 쥐어야 10점 만점을 받지만 여성은 37㎏을 넘으면 최고점을 받을 수 있다. 이밖에 왕복 오래달리기, 윗몸 일으키기, 배근력, 제자리 멀리뛰기 종목도 비슷한 차이를 둔다. 유연성을 평가하는 ‘앉아 윗몸 앞으로 굽히기’ 항목만 여성 지원자에게 남성 지원자 만점의 112% 수준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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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역차별일까

그렇다면 이런 체력 기준 때문에 여성은 남성보다 쉽게 소방관이 될 수 있는 것일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소방관 채용 시험은 여성 채용 비율을 제한해 소수의 인원만 뽑고 있다. 적은 선발인원 탓에 여성 응시자에게 소방관의 꿈은 이루기 어려운 목표다.

소방공무원은 화재 진압 업무를 주로 하는 소방대원(진압대원)과 구급대원, 구조대원 등으로 나뉜다. 관련 경력자만 뽑는 구급대원·구조대원과 달리, 소방대원은 공개채용으로 18살 이상 40살 이하이면 누구나 지원이 가능하다. 하지만 지난해까지 여성 채용 규모는 5% 안팎으로 제한됐던 게 현실이다. 현재 전체 소방공무원 가운데 여성 비율은 7.5% 수준이지만 대체로 구급대원이 많다.

최근 5년간 서울시 소방대원 채용 현황을 보면, 여성 선발 인원은 총 선발 인원의 4~6% 규모였다. 적게 뽑기 때문에 여성 지원자의 경쟁률은 남성 지원자의 경쟁률에 견줘 3배 가량 높았다. 현재 진행 중인 서울시 소방대원 채용(총 210명 선발)에서도 경쟁률은 남성이 11.92대 1인 반면 여성은 39.4대 1로 역시 3배를 웃돈다. 여성 선발인원이 10명에 그치는데 지원자는 394명이나 몰린 것이다. 지난해 하반기엔 여성 선발인원이 4명이었는데 지원자 603명이 몰려 무려 150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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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발 인원이 적으니까 여성 지원자의 필기시험 경쟁은 유난히 치열하다. 소방대원은 1차 필기시험→2차 체력시험→3차 신체검사→4차 인적성검사→5차 면접시험을 치른 뒤, 필기 75%, 체력 15%, 면접 10% 비율로 성적을 합산해 고득점자 순으로 합격한다. 1차 필기시험 합격자를 대상으로 2차 체력시험을 치른다. 2018년 상반기 서울시 소방대원 필기시험의 합격선(커트라인)은 남성은 68.35점이었지만 여성은 80.48점이었다. 같은 시험인데도 12점이나 차이가 난 것이다. 2017년 상반기엔 여성이 74.18점으로 남성(63.45점)보다 11점 가량 높았다. 서울 외 다른 지역도 필기시험 합격선은 대체로 여성 지원자가 크게 앞지른다.

일부 남성은 여성에 대한 체력시험 기준을 문제 삼고 있지만, 여성 입장에서 보면 너무 적은 선발 인원이 역차별로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소방청 “채용 확대하고 기준 높이겠다”

소방관뿐만 아니라 경찰공무원 채용에서도 젠더 논란이 뜨거웠다. 논란의 핵심은 ‘팔굽혀 펴기’였다. 현재 9급 경찰공무원 순경 채용에선 체력시험 5개 종목 중 하나로 팔굽혀 펴기를 실시하는데, 여성 지원자에겐 무릎을 바닥에 댄 채 하는 ‘니 푸시업’(knee push up)을 허용한다. 이에 대한 비난이 쇄도하자 경찰청은 최근 2020년부터 경찰대 입시와 경찰간부 선발 시험에서 팔굽혀펴기 자세를 무릎 뗀 방식으로 통일하기로 했다.

소방관 채용도 최근 변화가 일어날 조짐이 보인다. 지난 1월 정문호 소방청장은 취임 뒤 첫 기자간담회에서 “소방공무원의 여성 채용 비율을 10%까지 늘리겠다”고 밝혔다. 소방청은 지난 2월 “올해 전국 17개 시·도 소방본부별 소방공무원 신규채용에서 선발 인원 5641명 중 여성을 534명(9.5%) 선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난 6일 전국 지자체에서는 소방공무원 선발을 위해 필기시험이 치러졌다. 이달 말부터는 체력시험이 진행된다.

소방청은 향후에 여성 체력시험의 기준도 개선하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 현재 남성의 60% 수준인 체력시험의 여성 기준을 80%까지 높이는 방안, 전체 채용 과정에서 체력시험의 비중을 높이는 방안 등이 검토되고 있다. 소방관의 꿈을 가진 여성에게 채용 기회를 넓히면서 높은 육체적 역량도 함께 요구하겠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여성 채용 제한 자체를 없애고 대신 남녀 체력시험 기준을 통일하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자칫 여성이 전혀 채용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허경미 계명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소방관이나 경찰관을 뽑을 때 국민 생명과 직결되는 안전이란 가치를 최우선으로 둬야하고 체력시험 기준도 요즘 젊은이들의 체력수준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며 “여성 지원자에겐 채용 문을 열어주는 대신 체력을 더 갖추라고 요구하는 것이 맞는 방향”이라고 말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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