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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수)

[세계포럼] 기록을 남기지 않는 외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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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中日露 대사관 외교전문 줄어 / 위안부합의 협상팀 줄초상 뒤 / 본국 보고 기피현상 확산 / 업무 단절·수동 외교 전락

문재인정부 들어서 외교활동이 위축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미국·중국·일본·러시아에 파견돼 있는 4강 대사가 본국에 보고하는 외교전문(電文) 건수가 줄었다는 것이다. 외교전문은 외교부 본부와 해외공관이 지시·보고를 주고받을 때 쓰는 전보다. 주요 업무 중 하나인 동향·정보·교섭 등에 관한 보고를 기피하고 수동적이 된 것이다.

자유한국당 정양석 의원이 확보한 ‘해외공관별 외교전문 송신건수’에 따르면 미·중·일·러 주재 한국대사관이 외교부에 보고한 전문 건수는 2016년 2만2338건에서 지난해 2만558건으로 1780건(8.0%) 줄었다. 북·미 정상회담, 한·미 정상회담 등 민감한 사안이 수두룩했던 주미대사관마저 보고가 줄었다. 유난히 줄어든 곳은 주일대사관이다. 주일대사관 전문 보고는 2014년 8682건에서 4년 뒤인 2018년에는 34.1%가 줄었다. 같은 기간 주중대사관의 보고가 15.6% 감소한 것에 비하면 두 배 이상이 줄었다. 일본과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는데도 보고를 기피한 것이다. 주러대사관도 마찬가지였다. 외교관계가 복잡해지고 현안이 많아져 보고가 늘어야 하는데 반대 현상이 나타난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세계일보

한용걸 논설위원


4강 대사가 특임대사로 채워졌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나왔다. 대통령과 가까운 ‘힘 있는 인사’들이 대사로 간 뒤 외교부 보고를 ‘패싱’했다는 것이다. 특임대사들이 청와대로 직보하니 외교부 보고 수치가 줄었을 수 있다. 외교부 수장이 핫바지가 되는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보고가 줄어든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위안부 협상팀 학습효과 때문이다. 전임 정부에서 일본과 위안부 합의에 관여한 외교관들이 끌려 들어오고 인사에서 불이익을 당했다. 실무협상을 했던 이상덕 전 외교부 동북아국장은 싱가포르 대사로 나갔다가 정부가 바뀐 뒤 귀임조치 됐다. 김옥채 전 주일공사도 후쿠오카 총영사로 일하다가 지난해 물러났다. 주일대사관에 파견됐던 국정원 소속 J정무공사는 위안부 태스크포스(TF)에서 일했다는 이유로 여당의 공격을 받은 뒤 소환됐다. 대일 외교라인이 줄초상 난 이유는 그들이 했던 외교부 보고 때문이다. 일본과 협상할 때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기록해 남겨놓았다. 협상을 기록으로 남기고 후임자들이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정리해두었는데 뒷탈이 난 것이다. 그 후 외교가에서 기록을 최소화하는 풍토가 조성됐다. “최상의 합의”라고 평가받은 협상이 권력 주체가 바뀐 뒤 ‘새로운 해석’에 따라 적폐로 몰리는 현실이 이런 분위기를 만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이 남겨놓은 기록물이 부실한 것을 보고 통탄했다. 대통령기록물 관리법과 대통령기록관을 만들고 공공문서 보존을 강화했다. 대통령기록물을 일정 기간 함부로 열어볼 수 없도록 했다. 공개 규정을 까다롭게 해놓은 것은 정치보복이 두려워 기록물을 남기지 않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사관의 사초를 트집 잡아 경쟁 세력을 숙청한 사화의 재연을 방지하려 했던 것이다.

이 정부 들어서 적폐청산 드라이브에 활용한 게 전임 정권이 생산한 서류 뭉치였다. 청와대 위기관리센터의 캐비닛 뒤에 있던 서류를 공개하면서 세월호 보고시간 조작을 여론화했고, 수사가 시작됐다. 외국 대학에 교수로 나가 있던 전직 외교관은 정부의 여권 연장 거부로 귀국하자마자 공항에서 체포돼 구속수사를 받은 뒤 석방됐다. 평생을 국가를 위해 일한 데 대한 보답을 이런 식으로 돌려주었다. 이를 본 후배 외교관들은 “열심히 일해 봤자 우리를 보호해줄 안전장치가 없다는 데서 좌절감을 느낀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외교관들을 불러 모아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외교가 중요하다”고 아무리 질책해도 이들은 팔짱을 끼고 있을 것이다.

외교관들이 보고서 작성을 기피하면 후임자들은 ‘이기는 협상’에 나설 수 없다. 협상 테이블에서 상대국 파트너는 인수인계를 통해 포인트를 꿰고 나오는데 우리 측은 백지 상태에서 덤벼들어야 한다. 국가적 손실이 얼마나 큰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책을 불태운 지도자가 나라를 망하는 길로 이끌었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보고서를 남기지 않도록 하는 정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뻔하다.

한용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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