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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훌륭한 예술 기획자는 세상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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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윌리엄 켄트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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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미술기행-3]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을 고발했지만 결국 남아공을 변화시킨 인물은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이다." 지난 3월 말 서울 대치동 커피숍에서 만난 독일 조각가 파울 이젠라트(Paul Isenrath)가 말했다. 이젠라트는 1936년생으로 전 뮌스터미술대학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이 답변 전 그에게 느닷없지만 이렇게 물었다.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유럽을 휩쓴 6·8운동을 어떻게 봤으며 당신 작품에 영향을 미쳤는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애초부터 6·8운동이 세상을 바꿀 것으로 보지 않았다. 당연히 내 작품도 영향받지 않았다." 예상과 다른 심플한 답변이었다.

1968년 6월 프랑스 파리에서 펼쳐진 학생 시위는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모든 권위주의에 대한 종언을 고하는 사회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구호가 넘쳤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 '너를 파괴하는 것들을 파괴하라' 독일 내 6·8운동은 보다 근원적인 나치 시대에 대한 청산 요구와도 맞물렸다. 베트남에서의 확전은 반전 운동으로도 이어졌다.

윌리엄 켄트리지는 1990년대 초 아파르트헤이트(남아공의 극단적인 인종차별 정책)의 차별과 폭력을 소재로 한 목탄 드로잉 애니메이션으로 주목을 받은 후 음악, 역사, 미술, 공연이 어우러진 사회성이 강한 작품을 발표해왔다. 한국에서도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예술과 정치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대화는 주변 아파트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아파트 가격이 미쳤다. 아파트 한 채에 200만~400만달러 한다는 게 말이 되나." "아파트가 아니면 서울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지 않은가." 파울 이젠라트는 아파트 역할에 비중을 두었다. 정치가의 영향은 절대적이나 정치의 역할은 제한적이기도 하다. 위정자들은 1970년대 강남, 1980년대 상계동을 개발하면서 아파트가 동시대 사회 불평등의 핵심적 요소가 될 것으로는 예측하지 못했다.

지방자치권이 강한 독일은 중소 도시 중심으로 발달했는데, 한국은 대도시 위주로 발전했다는 얘기가 오간 끝에 "한국에서는 지방자치가 1990년대 중반 때 시작되었다"는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삶의 순위가 먹고사는 게 우선이었던 건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1974년 독일 북서부의 뮌스터시가 현대 조각가인 조지 리키(George Rickey)의 작품 '3개의 회전 사각형(Drei rotierende Quadrate)'을 거액에 구입하려고 하자 시민들은 비싸고 난해한 작품을 공공장소에 전시한다며 거부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Skulptur Projekte Munster)는 1977년부터 베스트팔렌미술관장 클라우스 부스만(Klaus Bussmann)의 리더십과 쾰른 루드비히 미술관의 큐레이터 카스퍼 쾨니히(Kasper Konig)의 아이디어로 공공미술 및 현대 예술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도를 높일 목적으로 시작하였다.

매일경제

백남준 '다다익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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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 부스만은 백남준을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1993년 백남준은 독일관 커미셔너인 클라우스 부스만의 추천으로 독일 대표 작가 두 명 중 한 명으로 베니스 비엔날레(Venezia Biennale)에 참가했다. 베니스 비엔날레의 성공은 백남준에게 또 다른 행운을 안겨주었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은 2000년 회고전을 제안했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는 10년에 한 번 개최되는 세계 최고의 공공미술 행사이다. 2년마다 열리는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 5년마다 열리는 독일 카셀 도쿠멘타(Kassel Documenta)와 함께 유럽의 3대 미술 행사에 꼽힌다. 매번 여름부터 가을까지 전 세계에서 60만명 이상이 방문 관람한다. 행사 기간중 30만명 인구의 소도시 호텔 방 값은 천정부지로 오른다. 뮌스터에서의 모든 전시는 시 거리, 공원, 광장 등 야외에서 진행된다.

2017년 참가작 중 터키 출신의 아이제 에르크만(Ayse Erkmen)의 'On water'는 용도 폐기 된 운하에 컨테이너를 가라앉혀 물 아래 다리를 놓고 참여자들이 마치 '물 위를 걷는' 성서 속의 경험을 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신발을 벗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 즐거워했으나 서울 강남에서 온 몇몇 관람객들은 도슨트(박물관·미술관 등에서 관람객에게 전시물을 설명하는 안내자)가 체험을 권했으나 "물이 더럽다"면서 작품 위를 걷는 경험을 포기한 경우도 있다.

클라우스 부스만은 미술 문화 정책 행정가이면서 전시 기획자이다. 그는 뮌스터시에 문화 산업을 일으켰고, 백남준을 독일 국가 대표로 선정해 동시대 세계 미술의 새로운 사조를 만들어냈다. 그는 당대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정치가가 아니면서도 지역의 미래 사회를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공공미술은 전원보다는 접근성 좋은 도심 중심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현대 미술의 역사가 짧은 한국의 대도시 현대식 건물에 들어선 이상한 조형물이 토건주의 시대의 어쩔 수 없는 산물이어서는 안 된다. 독일 거주 미술사가 유우숙(Woosook Yoo)은 '서울의 대형 상가나 아파트 단지의 조형물들을 현대적 수준의 작품들로 교체하는 작은 혁명을 이루었으면 한다'는 바램을 나타냈다.

'악의 평범성' 개념으로 유명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열정이 강렬할 뿐만 아니라 자유에 대한 비전과 결합된 경우만이 혁명(revolution)"이라고 설명한다. 훌륭한 예술 기획자, 행정가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심정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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