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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개미 털고 최대주주 배당잔치…‘자진 상폐’ 폐해 못막는 거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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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액주주 주식 싼값에 공개매수

자진 상폐 뒤 거액 배당금 빈발

주식분산 요건, 되레 ‘기름’ 부어줘

소액주주들 불만 목소리 ‘폭발’

거래소 ‘자사주 제외’ 대책 검토

“개선책 아닌 개악” 비판 나와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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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액주주 지분을 공개매수를 통해 사들여 스스로 증시를 떠난 기업들이 최대주주를 위한 ‘배당 잔치’를 벌이는 사례가 끊이지 않아, 주식을 헐값에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소액주주들이 분개하고 있다. 한국거래소는 뒤늦게 ‘자진 상장폐지’ 요건을 손질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지만 되레 소액주주의 권리를 옥죌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25일 알보젠코리아(옛 근화제약)는 거래소에 상장폐지를 신청했다. 자발적으로 상폐를 하려면 최대주주 등이 발행주식 총수의 95% 이상을 보유해야 한다. 이 회사의 대주주인 알보젠코리아홀딩스는 지난 2017년 2차례에 걸친 공개매수로 지분 92.2%를 확보했다. 자진 상폐 요건에 못 미쳤는데도 어떻게 상폐가 가능할까? 공개매수 영향으로 주식분산(일반주주 지분율 10%) 요건에 미달해 지난해 4월 관리종목에 지정됐고, 지난해 말에도 주식분산이 되지 않아 상폐 기준에 해당된 것이다. 90% 지분만 매집해도 1년여만 가만히 기다리면 ‘울고 싶은데 뺨을 맞는’ 격이다. 자본시장연구원은 “자진 상폐를 위한 공개매수로 유동 주식 수가 크게 감소하는 경우에는 일정 기간 관리종목 지정을 유예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대주주가 상폐를 통해 소액주주들을 쉽게 솎아낼 수 있는 것은 상법과 거래소 규정 덕분이다. 알보젠코리아는 지주회사인 알보젠코리아홀딩스와 주식교환을 마쳤다고 24일 공시했다. 주식교환은 자회사 주식을 넘기고, 그 대가로 지주사의 신주를 받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알보젠은 소액주주에게 주식이 아닌 현금을 줬다. 상법 조항(제360조의3 제3항 제4호)이 ‘금전이나 그 밖의 재산’도 줄 수 있도록 예외를 둔 탓이다. 자회사 주주로 남을 수 없게 된 소액주주가 지주사 주주로 갈아탈 수 있는 길목마저 원천봉쇄한 것이다. 한 법무법인의 변호사는 ”교환 대가를 주식이 아닌 현금으로 지급하는 것은 소액주주 축출과 상폐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알보젠코리아는 2012년 외국계에 인수된 뒤 배당을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 이익을 차곡차곡 쌓아 2018년 말 미처분이익잉여금이 766억원에 달한다.

물론 자진 상폐는 경영진의 권한이다. 상폐에 나선 기업들은 “신속한 의사결정, 경영활동의 유연성”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정말 그런 이유 말고는 없을까? 경남에너지는 공개매수를 거쳐 2016년 상폐됐다. 매년 주당 125원을 배당해온 이 회사는 소액주주를 모두 솎아낸 2017년에 주당 배당금을 1550원으로 크게 올렸다. 2018년 결산에서는 2480원을 배당했다. 2년 만에 20배 가까이 불어난 배당금은 전액 최대주주에게 돌아갔다.

에스케이이엔에스(SK E&S)가 대주주인 코원에너지서비스(옛 대한도시가스)는 상폐 이후 배당금 증가 폭이 더 컸다. 이 회사는 2012년 77억5600만원이던 배당금 총액이 상폐 뒤인 2014년 2600억원으로 33.5배 급증했다. 이에 대해 에스케이이엔에스는 “현금배당 중 1천억원은 양도받은 계열사에 출자했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상폐를 거듭 시도할 가능성이 있는 기업들은 배당에 인색하다.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의 자회사인 축전지 제조업체 아트라스비엑스는 2016년 2차례에 걸쳐 공개매수를 진행했다. 하지만 기업가치에 견줘 공개매수 가격이 지나치게 낮다고 판단한 소액주주들이 불응해 실패했다. 그러자 회사는 주당 배당금을 700원에서 300원으로 급격히 줄여 소액주주들의 반발을 샀다. 에스케이이엔에스의 또 다른 자회사 부산도시가스도 2013년 공개매수에 나섰지만 목표 수량을 확보하지 못하자 이듬해부터 배당금을 절반으로 깎았다.

소액주주들은 자진 상폐 시도가 지속되는 배경으로 자사주를 최대주주 지분율에 끼워 넣을 수 있도록 한 거래소 규정을 지목한다. 이로 인해 회삿돈으로 소액주주 지분을 사들여 상폐 요건을 맞추면 대주주는 돈 한 푼 안 들여도 된다. 파장이 커지자 거래소는 최대주주 지분율 산정 때 자사주를 제외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상폐에 동의하는 다른 주주들의 지분까지 최대주주 지분율에 합산하는 안을 예고해 ‘개악’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최대주주가 유인책을 통해 기타주주를 끌어들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광덕 선임기자 k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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