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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강천석 칼럼] 국민이 두리번거리며 속삭이는 나라는 病든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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利得 된다고 국민 약점 덧나게 하는 정치는 나쁜 정치

약효보다 毒性 강한 정책 新藥, 국민 상대 시험하면 暴政

조선일보

강천석 논설고문


난폭한 정치는 핸들이 없다. 브레이크도 고장이다. 듣는 거라곤 액셀러레이터뿐이다. 굽은 길을 만나도 방향을 틀 수 없다. 건널목의 ‘일단 멈춤’ 표지판은 아예 무시하고 달린다. 눈 없는 차는 눈 달린 사람이 피할 도리밖에 없다. 고속도로를 잘못 타 목표지와 다른 표지판이 나오면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액셀러레이터를 더 세게 밟는다. 성한 게 액셀러레이터 하나뿐이라서 그런지 운전사는 모든 상황을 그것 하나로 해결하려 든다.

'경제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는 한국은행 발표가 나온 날 청와대와 행정부 모양새가 꼭 이랬다. 경제부총리가 주재한 '긴급' 관계장관회의도 그중 하나다. 재작년·작년·올해 그 수많은 경제 예보(豫報) 가운데 경기가 호황(好況)이라고, 성장률이 높아질 거라고, 내다본 예보가 단 하나라도 있었는가. 호우(豪雨)경보는 어느 귀로 흘려듣고 이제야 우산 사러 빗속으로 뛰어드는가. 겉으론 허둥대는 척해도 속으론 '올 게 오고 말았다'고 중얼대야 중간은 가는 경제 관료다.

대통령 비서실장은 '경제가 개선되고 있다는 지표가 많다'며 좋은 지표를 널리 알리라고 지시했다. 부산 간다고 고속도로를 탔다가 '춘천 방향' 표지판이 계속 나타나니 핸들을 꺾는 대신 표지판을 '부산 방향'으로 바꾸어 달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달려봐야 달릴수록 부산과 멀어질 뿐이다. 이 정권은 횡단보도를 만나면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무제 앞 '일단 멈춤' 신호를 지킨 적이 없다. 그 바람에 길 건너던 영세 자영업자와 중소 상공인들은 영문도 모르고 변을 당했다.

이 정권은 소득 주도 성장론이 잘못됐다고 한 번도 시인하지 않았다. 차가 뒤집어졌는데도 차체(車體) 결함이 아니라 너무 천천히 달렸기 때문이라 우긴다. 대통령과 경제 참모들이 완전 동색(同色)이다. 모든 경제 지표에 빨간불이 들어온 작년 후반 대통령은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는 말씀을 남겼다. '정권의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라고 볼 수밖에 없다. "선용(善用)되든 악용(惡用)되든 위험한 것은 사상(idea)이다. 자신은 학문과 거리가 멀다고 믿는 정치인들도 어느 죽은 경제학자의 노예다." 경제학자 케인스 말이다. 이 정권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죽은 경제학자는 과연 누군가.

민주 정치는 어떤 경우에도 국민을 상대로 실험하지 않는다. 임상시험에서 부작용 여부가 검증되지 않은 정책을 처방하는 일은 금기(禁忌)다. 난폭한 정권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신약(新藥) 사용에 주저하지 않는다. 소득 주도 성장은 약을 쓰고 난 환자 용태로 보면 약효보다 독성이 강하다는 쪽으로 이미 굳어졌다. 그런데도 이 정권은 망설임이 없다.

어느 국민이든 장점이 있으면 약점(弱点)도 있다. 좋은 정치는 정치적 이득이 눈에 보여도 국민의 약점을 덧나게 할 위험이 따르는 정책은 삼간다. 나쁜 정치는 여기 구애받지 않는다. 속담에는 그 나라 국민이 스스로를 돌아본 약점과 장점이 담겨 있다. 세계 속담 사전 '공짜' 항목을 펼치면 한국 속담이 줄줄이 나온다. '공것이라면 양잿물도 마신다' '공술 한 잔 보고 십 리 간다' '공것이라면 눈도 벌겅 코도 벌겅' '공것은 써도 달다' '공짜라면 당나귀도 잡아먹는다' 등등이 고구마 올라오듯 올라온다. 일본 속담은 '공짜보다 싼 것은 없다'와 '공짜보다 비싼 것은 없다' 두 개다. 앞의 것은 거의 쓰이는 경우가 없다. 영국·미국·독일 속담도 공짜의 무서움을 경계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 정권의 정책에는 멀리 길게 내다보고 나라의 앞날을 염려하는 고심(苦心)의 흔적이 없다.

독재를 꿈꾸는 정치는 자기네가 권력의 자리에 오르고 나선 사다리를 걷어찬다. 경쟁자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다. 사다리는 올라갈 때만이 아니라 내려올 때도 필요하다는 걸 잊는다. 권력을 내놓지 않겠다는 집착이겠지만 한번 올라가면 반드시 내려와야 하는 게 권력의 자리다. 사다리의 대표가 공직선거법이다. 사다리가 사라지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수밖에 없다.

언제부턴가 우리 국민, 특히 기업 하는 사람들은 말하기 전에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속삭이는 말투로 변해가고 있다. 어딘가에서 권력의 눈과 권력의 귀가 엿보고 엿듣는지 모른다고 떨고 있는 것이다. 속삭이는 사회는 병(病)든 사회다. 독재 치하에서 속삭이며 살았다는 걸 훈장처럼 달고 다니던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나니 하루하루 더 무서운 나라로 변해가고 있다.

[강천석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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