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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나라의 근간 세금 기록에 30년 쏟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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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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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이 감내하기 어려운 게 세금이다. 넉넉한 자에게는 세금을 경감해주면서, 가난한 자에게는 중과세하고, 심지어 죽은 사람(백골징포·白骨徵布)과 젖먹이(황구첨정·黃口簽丁)에게까지 세금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19세기 조선시대 말 현감(縣監)이 공평한 세무행정을 할 것을 당부하며 내린 문서인 '현감하첩(縣監下帖)'에 담긴 내용이다.

비슷한 시기 전북 남원 지역에서 지켜야 할 각종 규약과 예법이 수록된 '시라산 향약완문(時羅山 鄕約完文)'이란 제목의 책에는 다음과 같이 세금 납부와 관련된 내용이 소개된다.

"대동미(大同米)와 여러 가지 역(役·노동력 동원)을 관령에 따라 함부로 징수해 백성이 고통을 받지 않도록 한다. 마련하기 힘든 사람은 친족에게 징수하고, 만약 친족이 없으면 마을(里)에서 배분해 기한 내에 납부하도록 하라."

족징(族徵·친족이 대신 납부), 동징(洞徵·주민이 대신 납부), 인징(隣徵·이웃이 대신 납부) 등 세금 징수에 있어서 연대책임을 강조한 것이다. 모두 조선 후기 삼정문란 중 군정(軍政)의 폐해 사례에 해당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수 통계 자료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우리나라 조세부담률(국민총생산 대비 조세총액 비율)은 약 20%로 OECD 회원국 중 매우 낮은 편이다. 하지만 세금 인상에 반대하는 '조세 저항'은 매우 강한 편이다. 한국인이 유독 납세 의무는 다하지 않고 권리만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다. 과거 조선시대 세정의 역사를 보면 조세 저항의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국고서협회장을 역임한 고창석 씨(74)는 지난 30여 년간 우리나라 세금 관련 고서와 고문서를 약 450점 수집했다. 이 중 200여 점의 원본 사진과 해설을 엮은 '사료로 보는 조세도록'을 작년 9월 비매용으로 출간했다. 고씨는 최근 매일경제와 인터뷰하면서 "한 나라를 지탱하는 근간은 국가 안보를 책임지는 군사력과 국가 재정을 뒷받침하는 조세"라며 "특히 조세도록을 책으로 만든 건 내가 처음이다. 나라가 했어야 할 일을 내가 나서서 했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육군보병학교를 졸업하고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했던 군인 출신 고씨는 30대 초반이었던 1974년 당시 전북대 학군단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고서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친하게 지내던 교수가 운영하는 고서점을 수시로 찾았는데, 그것이 계기가 돼 대위 예편 후 서울 장안평 인근에서 고서·고문서를 주로 취급하는 화랑을 열었다.

그는 "당시 조선시대 그림이나 도자기 등은 수천만 원대에 거래됐던 반면, 중요한 기록문화는 고작 100만원 수준으로 헐값에 거래되는 것을 보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집중적으로 구입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군 출신이다 보니 처음에는 군사 관련 자료를 모으다가 점차 조세 분야로 관심이 옮겨갔다. 고씨 덕분에 고문서 거래시장이 활성화됐다는 평가가 나왔고, 그러면서 2001~2003년 고서협회장을 지냈다.

세종시 국세청 본청 1층에 있는 국립조세박물관 설립을 처음 건의한 것도 고씨다. 원래 세무대학 내에 조세박물관을 만들려 했는데 대학이 2001년 폐교되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결국 2002년 10월에서야 국세청 내에 개관할 수 있었다.

고씨는 "책에 담긴 자료 중 30% 정도만이 조세박물관에 전시돼 있고, 나머지 70%는 아직 내가 가지고 있다"며 "조세는 한 시대의 사회·생활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분야인 만큼 세금 관련 역사 교육이나 문화 콘텐츠 등으로 활용됐으면 한다"고 제언했다.

고씨가 가진 고문서 가운데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자료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임시정부령 인구세 시행세칙 개정에 따라 미주 지역 대한민국 민회 수세(收稅) 총위원회가 인구세를 거둔 뒤 보관해둔 영수증이 있다. 연 1원씩 징수했던 인구세를 연 10원으로 올린다는 내용의 공보(公報)도 있고, 임시정부 인구세 영수증으로 활용됐던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미국 워싱턴에 설립된 임시정부 외교기관)의 공채금 영수증 용지도 있다. 용지에는 김규식 임시정부 부주석의 서명도 있다.

고씨는 "지금까지는 '나'라는 개인이 사명감을 가지고 우리나라 조세 관련 고서·고문서를 모았지만 이제는 국세청을 비롯한 정부와 기업이 그 역할을 대신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유섭 기자 / 사진 = 한주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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