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김성희의 천일서화(36)
이렇게 말하면 금방 알아들을 이가 드물 것이다. 하지만 이건 과학적으로 해체, 분석하고 남은 라면의 정의다. 맞다, 그 라면이다. 당초 선보였을 때는 특별한 이들만 먹는 별식이었다가 학생들의 간식으로, 주머니가 가벼운 이들의 끼니로 변신을 거듭하면서 단군 이래 한국인의 식생활을 바꾼 가장 획기적 식품 중 하나인 그 라면이다.
특별한 이들만 먹는 별식이었다가 학생들의 간식으로, 주머니가 가벼운 이들의 끼니로 변신을 거듭한 라면. [사진 pixab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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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만큼 라면에 얽힌 추억 한 자락이 없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필자가 가장 맛없는 라면을 가장 맛있게 먹었던 것은 군 훈련소에서다. 주말이면 점심으로 라면이 나왔는데 그 많은 훈련병이 먹을 라면을 끓이는 게 만만치 않았던지 취사병들은 라면을 끓이지 않고 삶았다. 게다가 취사장에서 제법 떨어진 내무반으로 가져오는 과정에서 면발은 퉁퉁 불고 국물은 실종되었던 라면. 그래도 짬밥만 먹다가 먹는 별식이란 느낌이 강해서 정말 맛나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우리에겐 제2의 주식이 된 라면이지만 이를 두고 깊이 생각한 적은 없다. 60년대 국내에 들여온 일화를 전해 듣기는 했고, 라면이 건강에 해로운지 아닌지를 두고 오가는 이야기를 설핏 듣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어차피 라면은 라면, 이걸 맛있게 먹는 방법만 알면 되지 싶어서였다.
한데 세상엔 특이한 이들이 적지 않다. 라면에 얽힌 이야기를 엮거나 도쿄의 라면 맛집에 관한 정보, 각종 라면 조리법 등을 다룬 책들이 열 손가락을 넘는다.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책은 『라면으로 요리한 과학』(이령미 지음, 갤리온)이다.
라면을 둘러싼 소소한 과학적 관심사를 다룬 책 『라면으로 요리한 과학』과 라면이 아닌 일본식 '라멘'을 주 소재로한 책 『라멘이 과학이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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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절판되어 e북으로나 만날 수 있는 이 책은 라면을 둘러싼 소소한 과학적 관심사를 다룬 책이다. 이를테면 ‘라면엔 반드시 찬밥이어야 하는 이유’ ‘과학자는 면보다 수프를 먼저 넣는다’ ‘왜 라면은 양은냄비에 끓여야 더 맛있을까’ 등등 우리가 지나치는 ‘라면의 과학’을 풀어준 책이었다.
한데 이번엔 라면의 본고장이라 할 일본인 과학저널리스트가 쓴 책을 최근 만났다. 『라멘이 과학이라면』(가와구치 도모카즈 지음, 부키)이다. 호기심에서 펼쳐 들었지만 이 책은 앞의 ‘라면 책’과는 매우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라면’이 아니라 ‘라멘’에 관한 책이란 점이다.
우리가 흔히 만나는 인스턴트라면을 다룬 별도의 장(章)이 있긴 하지만 ‘라멘’, 즉 이제는 우리 사회에서 제법 특식 대접을 받는 일본식 라면을 주소재로 했다. 게다가 라멘으로 ‘요리’한 게 아니라 라멘 자체를 분석한 ‘라멘의 과학’이기도 하다.
라멘의 맛을 좌우하는 육수를 만드는 데 가쓰오부시(가다랑어포), 멸치, 다시마, 돼지 뼈, 닭 뼈, 채소에 달야의 아마구리(일본식 단밤)가 쓰인단다. 해장라멘이 당기는 이유는 술을 마시고 나면 알코올을 분해하는 과정에서 혈당이 떨어지는 바람에 이를 보충하기 위해 탄수화물이나 단것이 먹고 싶어지는데 술을 마시면 혀의 감각이 마비되어 더욱 진한 맛을 찾게 되기 때문이란다.
일본 규슈의 한 라멘집의 라멘.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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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주 관심사인 인스턴트라면에 관해 흥미로운 이야기도 이어진다. 안도 모모후쿠란 이가 아내가 튀김 만드는 모습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고온의 기름으로 국수를 튀겨 치킨라멘을 만든 것이 1958년이다. 이를 순간유열건조법이라 하는데 튀길 때 수분을 급속도로 증발시키면 면발에 작은 구멍이 무수히 생겨 이 구멍에 물이 스며들면 면이 금세 촉촉해지는 것이 인스턴트라면의 비법이다.
라면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이 통설인데 이 책의 지은이는 걱정하지 말란다. 통념과 달리 기름이나 용기의 환경호르몬 문제는 잘못 알려진 것이라며 인스턴트라면 자체에는 건강에 해로운 요소가 없단다.
지은이는 균형 잡힌 식사가 중요할 뿐이라며 “밥이나 식빵만 먹는 사람이 없는데 라면만 완전식품이기를 요구하는 것은 가혹하다”고 주장한다. 라면을 ‘발명’한 안도 모모후쿠는 50년간 매일 인스턴트라면을 먹었는데 아흔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까지 골프를 즐겼다나.
이 책들을 읽는다고 맛있는 라멘을 선택하거나 라면을 맛나게 끓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식탁의 풍미를 돋우고 지적 허기를 메워주니 든든한 책이랄까.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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