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레이이라주 코르샤의 알베르게 숙소. 코임브라로 향한 길에서 순례자의 새로운 쉼터 마을의 숙소이다. [사진 박재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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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죽어라 많이 하는데 수입이 너무 적어요.” 안토니오는 잠시 숨을 고른 후 면장갑을 다시 꼈다. 코티샤(Cortica)까지 걷는 날이었는데 버려진 건물처럼 보였던 창고 앞에서 쉬다가 그를 만났다. 스물일곱살의 포르투갈 청년 안토니오는 창고에 쌓여있던 포르투갈 호두, 헤이즐넛 포대를 트럭으로 옮겨 싣는 중이었다.
뜨거운 햇볕을 피해 창고가 드리워 준 그늘에 앉아 사과를 먹으며 땀을 뻘뻘 흘리는 사람을 보고 있자니 공연히 미안했다. 30kg들이 포대 스무개를 모두 올린 후 안토니오는 장갑을 벗고 앉아 숨을 돌렸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주택에 투자하는 시간과 정성이 대단하다. 시골 마을 깨끗한 회벽과 페인트로 집을 가꾸고 단장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사진 박재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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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두꺼운 뿔테 안경의 마른 몸매 안토니오와 그가 하는 일은 어딘지 부조화했다. 도시로 나갔다가 취직이 되지 않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안토니오의 영어는 이때까지 만난 모든 포르투갈 사람 중에 가장 유창한 실력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는데 이제는 요령이 생겨서 괜찮아요. 힘든 건 문제가 아닌데 수입이 변변찮아 아직 엄마 집에 얹혀사니 그게 한심한 일이죠.”
포르투갈의 시골길, 스물일곱살 청년 안토니오를 만난 농가 창고. 포르투갈에는 헤이즐 너트와 아몬드를 많이 키운다. [사진 박재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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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시골길, 유칼립투스 향이 섞여 보들보들한 바람을 맞으며 사과를 먹는 한국 아줌마에게 안토니오는 하필이면 국가 경제에 대해 말을 꺼냈다. “포르투갈은 완전히 망할 뻔했어요. 우리가 2011년에 IMF 구제 금융을 받은 거 아시나요?”
혼자 걷는 도보여행 중에는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한나절을 보내는 경우가 자주 있고 흔하다. 자신을 만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사진 박재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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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잡으로 쉬지 않고 일하는데 한 달에 600유로를 겨우겨우 벌어요.” 수도요금과 렌트비를 생각하면 도저히 독립할 수가 없다는 안토니오에게 쉽사리 위로 따위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너는 젊으니까 힘을 내라든가 앞으로 기회가 있을 테니 좌절하지 말라는 말을 감히 할 수 없었다. 이미 자기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앞에서 어설픈 위로나 격려는 불필요하고 오히려 상처를 줄지도 모를 일이니까.
무언가 주고 싶어서 배낭에 비상으로 넣어둔 초코바 봉지를 꺼내 건넸다. 나는 초콜릿과 와인은 세상의 문제 대부분을 해결해 준다고 믿는 사람이다. 안토니오는 초콜릿 봉지를 사양하다가 겨우 두 개만 집으면서 이내 그의 눈썹에 엉켜있던 긴장을 풀고 웃었다. 그의 짐을 덜어 주지는 못했어도 잠시라도 웃게 하고 나니 그의 미소만큼 나도 행복해졌다.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덮은 도로의 틈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나무가 자란다. 시련과 어려움에 마주한 안토니오를 만난 길에서 자라는 그와 닮은 나무에 응원을 보냈다. [사진 박재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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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을 주시니까 할머니가 떠올라요.”
“안토니오, 할머니는 너무 심한 거 아냐? 너희 엄마랑 비슷할지 몰라도 어떻게….”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할머니는 저만 보면 초콜릿 단지를 건네주세요. 아직도 제가 아이라고 생각하시나 봐요. 할머니는 호두 껍데기 벗기는 일을 하시는데 일 년에 60톤 정도가 돼요. 믿어지세요? 60톤이면 이 트럭으로 열번은 날라야 하는 정도의 양이에요.”
포르투갈 숲길을 걸으면서 피톤치드와 흙냄새로 청정에너지를 충전한다. [사진 박재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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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다 보면 힘을 주는 사람들을 만난다. BTS에 열광하는 소녀의 열렬한 한국말 인사에 힘을 얻는 날이 있고,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펴서 힘을 내라고 격려해 주는 사람 덕분에 주저앉고 싶을 때 더 걷게 된다. 그날 코티샤로 가는 길에 만난 안토니오는 포르투갈을 걷는 동안 자주 떠올랐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어떠한 때라도 삶과 마주 서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 청년. 안토니오를 떠올릴 때마다 이베리아반도 서쪽 끝을 걷는 나도 힘을 얻었다. 자기 책임이 아닌 불운을 만나도 불평하지 않고 감당하는 사람에게는 스스로 만들지 않은 행운도 들이닥친다고 믿고 싶다.
햇볕을 받으려 경쟁하듯 높이 높이 자라는 나무. 혼자 자라는 나무는 옆으로 가지와 잎을 낸다고 한다. 산처럼 높이 웃자란 유칼립투스 나무. [사진 박재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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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티샤를 거쳐 라바살(Rabacal)까지 가는 길, 유난히 마을 입구마다 아름다운 성당이 많았다. 일부러 들어가 다리를 쉬며 그렇게 기도를 했다. ‘오늘의 삶을 마주할 힘, 딱 그만큼의 기쁨과 힘을 계속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안토니오와 세상의 모든 안토니오 할머니를 위하여. 그것은 나와 내 가족, 또한 모두를 위한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므로.
박재희 기업인·여행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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