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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이사람]"커피도 과학...화학책 읽으며 끊임 없이 맛 연구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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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수 끝에 세계 1위 거머쥔 전주연 바리스타

유치원 선생님 꿈 접고 알바하던 카페 취업

최고의 바리스타 되려 11년간 연습 또 연습

올 한국인 최초 월드바리스타챔피언십 우승

다양한 맛 설명 가능한 유기화학적 접근 재미

대학 식품공학과와 협력해 커피 제조법 개선

7월부터 커피 생산국 남미서 직접 농법 연구

부산 세계적 스페셜티 커피 도시로도 알릴 것

서울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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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국민의 1인당 연간 커피 소비량은 500잔을 훌쩍 넘는다. 대한민국이 ‘커피 공화국’으로 불리는 이유다. 이처럼 커피 사랑이 유별난 나라지만 알고 있는 토종 바리스타의 이름을 물어보면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달 ‘커피 업계의 올림픽’으로 불리는 ‘월드바리스타챔피언십(WBC)’에서 한국인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한 전주연 바리스타가 남다른 의미를 갖는 이유다. 부산에 있는 ‘모모스커피’의 바리스타로 활동하는 전주연(32) 이사는 한국인 최초이자 여성으로서는 역대 두 번째로 챔피언에 올랐다.

최근 본지와 만난 전 바리스타는 작고 여린 체구에도 단단한 기운을 뿜어냈다. 우승한 후 수많은 해외 출장과 인터뷰 등 촉박한 일정으로 체력이 고갈돼 ‘링거 투혼’까지 펼칠 정도였지만 미소는 한없이 밝았다. 커피를 ‘에너지’라고 정의한 그다운 모습이었다. 전씨는 “커피를 통해 에너지를 받기도 하고 내가 만든 커피로 누군가는 에너지를 충전한다”며 “한 잔의 커피를 가운데 놓고 대화를 나누면서 좋은 기운이 오고 가기 때문에 커피는 에너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치원 선생님 꿈나무가 ‘커피 연출가’가 되기까지=전씨의 오랜 꿈은 사실 유치원 선생님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 졸업을 앞둔 무렵 유치원 현장실습으로 그동안의 꿈이 ‘현실’이 아닌 ‘로망’에 가까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씨는 “10년 넘게 유치원 선생님의 꿈을 키웠지만 막상 실습을 해보니 즐겁지 않았다”면서 “오히려 귀찮고 피곤하다는 마음을 갖게 됐는데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꿈을 접었다”고 말했다.

진로에 대해 한창 고민에 빠졌던 그는 지금의 모모스커피 대표와 우연히 재회하게 됐다. 전씨가 대학 3학년 때부터 2년간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던 곳의 사장이었다. “유치원 선생님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너무 힘들다”는 전씨의 말을 들은 모모스커피 대표는 다음주부터 가게로 출근하라고 권했다. 시키지 않아도 구석구석 청소해 매장을 늘 ‘새집’처럼 만들어놓던 전씨를 누구보다 아꼈기 때문이다.

전씨도 대표의 제안을 바로 받아들였다. 돌이켜보니 카페에서의 일은 마냥 즐거웠다. 전씨는 “주말 알바였는데도 평일에 수업을 마치면 카페로 향할 만큼 일이 즐거웠고 뭐라도 하나 더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면서 “부모님이 ‘4년제 대학을 나와 커피집에서 일하냐’며 심하게 반대하셨지만 내가 좋아하고 재밌어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커피 업계에 발을 디딘 그는 지난 2009년부터 ‘WBC 출전’을 향해 내달렸다. 세계 각국의 대표 바리스타들이 모여 경합하고 바리스타 자체로서 존중받는 자리가 그저 멋져 보였다. WBC 출전 기회는 국내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단 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그는 2009년부터 2011년까지 국내 대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슬럼프에 빠진 전씨는 1년의 휴식기간을 갖고 다시 도전했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 3년 연속 국내 대회 결선까지 올랐지만 1등은 손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지지 않았다.

이때 그가 선택한 돌파구는 심사위원 참가였다. 전씨는 “1등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다음 연도 참가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2016년 국내 대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며 “원래 ‘깡다구’가 있는 스타일인데 바리스타가 되기로 마음먹고 나서 처음으로 세운 목표가 WBC 출전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2017년 한 해를 건너뛴 그는 2018년에 재도전하며 국내 대회 1등을 꿰찼다. 하지만 세계 무대 제패에는 실패했다. 극도의 긴장감 탓에 분쇄한 커피를 압착하는 ‘탬핑’을 생략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결국 커피 추출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제한시간 초과로 그는 14등에 머물렀다.

올해는 마음가짐부터 달랐다. “한 번 더 생긴 기회이기 때문에 부담감을 덜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재밌게 풀어보자는 생각으로 준비했어요. 준비 기간 중 새로운 문제가 생기더라도 곧 해결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니까 힘든 게 하나도 없었죠. 지난해에는 친구들이랑 연락도 못 했는데 이번에는 주변 사람들과도 자주 만나면서 여유를 가졌어요.”

대본이 완성된 후에는 무한 반복연습에 돌입했다. 어느 시점에 어떤 심사위원과 눈을 맞춰야 할지까지 섬세하게 챙겼다. 발표 때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는 곡을 듣고 비트에 따라 달라지는 말의 속도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전씨는 “무대 연출에서 연기까지 마치 한 편의 뮤지컬을 완성하는 느낌이었다”고 떠올렸다.

전씨는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매년 100번을 채워 무대에 올랐지만 올해는 딱 ‘77번’으로 정했다. 23번 덜 연습해도 괜찮다는 자신감이었을까. 결국 그는 올해 한국인 최초의 월드바리스타챔피언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11년간 8번의 도전 끝에 얻은 달콤한 우승이었다.

올해 그의 시연에서 눈에 띈 것은 심사위원과 바리스타 사이의 가까운 간격이었다. 심사위원은 테이블 뒤쪽에 자리를 잡지 않았다. 전씨가 ‘당돌’하게도 심사위원을 테이블 위에 앉혔기 때문이다. WBC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기존의 틀을 깨뜨린 발표에 ‘힙’하다는 평가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발표 내용에 화학적 설명이 많이 들어가 심사위원들에게 보다 친근하게 설명하기 위해 색다른 시도를 선보였다”고 말했다. 한때 친절한 유치원 선생님을 꿈꿨던 그다운 ‘눈높이 프레젠테이션’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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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도 과학”···최상의 맛을 내기 위한 끝없는 연구=단지 퍼포먼스만 화려했던 것은 아니다. 15분간의 시연에서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은 ‘맛’. 심사위원 4명에게 에스프레소 4잔과 밀크 음료 4잔, 창작음료 4잔 등 총 12잔을 제공하는데 신맛·단맛·쓴맛의 조화와 질감·향 등이 평가 항목이다. 여기에 바리스타가 말하려는 커피 철학이 발표로 전달됐는지도 점수로 매겨진다.

전씨가 올해 선보인 주제는 ‘탄수화물이 커피의 향미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그는 “평소 커피를 마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가 바로 커피가 가지고 있는 단맛과 질감”이라며 “커피의 성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단맛을 내는 탄수화물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에 착안해 단맛을 더 상승시킬 수 있는 방법을 소개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전씨가 선택한 원두도 탄수화물이 풍부한 콜롬비아 라팔마 엘 투칸 농장의 ‘시드라’ 품종이다. 원두는 김치의 발효 원리와 같은 ‘젖산 발효(lactic acid fermentation)’ 과정을 거쳤다. 원두를 산소가 적게 포함된 밀폐 공간에 놓고 발효 과정을 거치면 젖산의 양이 증가하면서 부드럽게 만들어줬다.

전씨는 창작음료 부문에서 만점을 받았다. 커피 찌꺼기에 포함된 탄수화물을 고압·고온으로 녹이고 커피에 섞어 단맛을 극대화했다. 그는 “커피 열매는 수확 당시 탄수화물을 50%나 함유하고 있지만 커피로 만들어지면 한 잔에 3%가량으로 급격히 줄어든다”면서 “원두를 볶는 로스팅 과정 등 단계별로 커피가 완성되면서 탄수화물이 사라진다는 점을 발견하고 지난해 부경대 식품공학과와 산학협력을 맺어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아임계수 공법을 적용했다”고 말했다.

밀크 음료에도 그만의 커피 철학이 반영됐다. 단맛을 희석하는 수분의 비중을 낮추기 위해 우선 우유를 얼렸다. 이후 얼린 우유를 절반 정도 녹이면서 탄수화물의 비중을 높여 깊은 단맛을 자아냈다. 복잡한 커피 제조 공법은 전씨가 평소 쌓아둔 화학 지식에서 나왔다. 화학을 전공한 적이 없었지만 전씨는 맛을 논리적으로 해석해주는 화학에 이끌렸다. “평소에도 식품이나 화학 책을 읽어요. 관심 가는 단어를 체크하고 대회 준비 기간이 되면 다시 펼쳐보기도 하죠. 침대가 과학이라고 하잖아요. 커피도 과학이에요. 커피가 다양한 맛을 내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거든요. 저는 로스팅 과정에서의 열역학 같은 물리학적 접근보다 맛으로 설명이 가능한 유기화학에서 재미를 느꼈어요.”

세계 1위 바리스타가 내린 커피를 흉내라도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봤다. 전씨는 “해마다 기후가 다르기 때문에 매년 같은 농장에서 같은 품종을 생산한다고 해도 똑같은 향미를 낼 수 없다”면서도 “다만 창작음료의 경우 에스프레소에 블랙베리잼을 조금 넣고 시중에서 판매되는 식혜를 섞어 넣으면 비슷한 향미를 느낄 수 있다”고 귀띔했다.

◇그의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제 이름을 건 커피 브랜드를 내기보다 커피 생산국에서 활동하고 싶어요. 커피 소비국이 아니라 생산국에서 농법을 연구하는 일요. 발전된 농법을 갖춰야 더 좋은 품질의 커피가 지속적으로 생산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커피를 만드는 사람도 좋은 커피를 계속 다룰 수 있고 소비자들도 더 좋은 커피를 마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곧장 실행에 나선다. 전씨는 오는 7월 세계적 커피 산지인 남미로 떠날 계획이다. 커피 생산 시기에 맞춰 현지 농가를 둘러보고 커피에 최적화된 재배환경을 연구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9월까지 브라질과 콜롬비아·에콰도르 등을 둘러볼 예정이다. 또 내년 2월부터 4월까지는 코스타리카와 과테말라·파나마 등 중남미 지역에 머무른다. 전씨는 “올해 우승을 하든 안 하든 농가 쪽에서 활동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우승이 좋은 계기가 돼 다음 목표에 금방 다가갈 수 있게 됐다”면서 “농사를 계속 지으면 토양 손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손상 없이 커피 농사를 이어갈 수 있는 방법 등을 연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어 공부도 꾸준히 할 생각이다. 이달 말에 호주로 떠나는 것도 어학연수 때문이다. 그는 “영어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한국 커피 시장의 가능성과 가치를 세계에 충분히 알릴 수 없다”며 “두 달 정도 호주에 머물면서 영어 실력 향상에 매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바리스타의 꿈을 키워준 터전인 부산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다. 전씨는 “또 다른 목표 중 하나가 부산을 세계적인 스페셜티 커피의 도시로 만드는 것”이라며 “다만 커피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에 모모스커피는 무리하게 확장하지 않을 것이고 이 외의 다양한 방법으로 부산을 세계에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허세민기자 semin@sedaily.com 사진=오승현기자

She is...△1987년 경남 창녕 △2005년 동서대 사회복지학과 입학 △2009년 부산 모모스 커피 소속 바리스타 △2018년 월드바리스타챔피언십 국가대표로 출전. 랭킹 14위 △2019년 월드바리스타챔피언십 최종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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