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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7 (일)

너도나도 뛰어든 ESS 화재 사고로 된서리-태양광 부추긴 정부는 뒷짐만…업계 곡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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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이코노미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를 저장하는 ESS 화재가 잇따르면서 업계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사진은 한국전력이 경북 경산에서 운영 중인 ESS 시설. <한국전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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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에너지저장장치) 화재로 기업들은 다 죽게 생겼는데 정부는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는 느낌입니다. 아직까지도 화재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니 답답하네요.” (재계 관계자)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를 저장하는 ESS 화재가 잇따르면서 기업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1년이 넘도록 화재 사고 원인 규명은커녕 안전 대책조차 내놓지 못했다. 정부가 늑장 대응하는 사이 ESS 업계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중이다. 정부가 조사 발표 전까지 ESS 가동을 중단해달라고 요청하면서 신규 발주가 사실상 중단됐기 때문이다.

사건 발단은 이렇다.

지난 2017년 8월 전북 고창전력시험센터에서 ESS 화재가 처음 발생했다. 화재 사고가 한두 건씩 늘어나더니 지난해에 이어 올 들어서도 강원 삼척, 울산, 세종 등 전국 곳곳에 화재가 끊이지 않았다. 2017년 8월부터 최근까지 전국 곳곳에 발생한 ESS 화재만 22건에 달한다. 피해액만 200억원을 웃돈다.

그런데도 정부는 지난해 말에야 민관 합동으로 공식적인 ESS 화재 원인 조사에 나섰다. 전국 ESS 사업장 전체에 대해 정밀안전진단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화재는 계속됐고 안전진단을 통과한 시설에서도 불이 나면서 업계 우려가 커졌다.

답답한 정부는 올 초 다수의 인명 피해가 우려되는 다중이용시설과 별도 건물로 분리되지 않은 공장용 ESS에 대해 가동 중단을 권고했다. 이로써 전국 1490개 ESS 사업장 중 35%인 522곳 가동이 기약 없이 멈춰 선 상태다. 주요 ESS 사업장 가동 중단으로 당장 국내 업계가 직격탄을 맞았다. 올 들어 국내 ESS 발주가 단 한 건도 이뤄지지 않을 정도로 수주가 뚝 끊기면서 배터리 생산업체 실적부터 고꾸라졌다.

LG화학은 지난 1분기 전지사업 부문에서만 1479억원 적자를 냈다. 설비 점검 비용 외에도 가동 중단에 따른 손실 보상을 위한 충당금 800억원, 국내 출하 전면 중단에 따른 손실 400억원 등 ESS 관련 손실만 1200억원에 달했다. 또 다른 배터리 생산업체 삼성SDI의 1분기 영업이익도 1188억원에 그쳐 전분기 대비 52.2% 감소했다.

PCS(전력변환장치)를 생산하는 전력 솔루션 업체 분위기도 좋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PCS는 에너지를 저장하는 배터리와 함께 ESS 핵심 부품으로 꼽힌다. LS산전의 1분기 영업이익은 287억원에 그쳤다. 지난해 1분기(554억원) 대비 절반으로 뚝 떨어져 어닝쇼크를 기록했다. 허민호 신한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국내 설비투자 감소, ESS 화재에 따른 수주 부진 영향으로 LS산전의 1분기 실적이 악화됐다”고 밝혔다. 그나마 대기업은 버틴다지만 ESS 설치 등을 맡아온 중소업체는 하나둘씩 도산 위기에 내몰리는 형편이다.

사정이 심각한데도 정부는 아직까지 ESS 화재 원인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5월 2일 정부세종청사에서 ‘민관합동 ESS 화재 사고 원인조사위원회(민관합동조사위)’ 조사 결과를 중간 발표했다. 당초 3월 말 조사 결과를 내놓기로 했지만 원인 발표를 미뤘고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다수의 제조기업, 제품이 관련돼 있는 데다 실증이 많이 필요해 화재 원인,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6월 초까지 ESS 안전 강화, 생태계 육성 방안을 발표하겠다”고 밝히면서 또다시 발표 시기를 늦췄다.

민관합동조사위는 지난해 말부터 60여차례 회의를 열어 전기 충격에 의한 기기 고장 가능성을 들여다봤지만 명확한 원인은 나오지 않았다. 시스템 측면에서는 설계 운영상 문제점, 결로·먼지 등 열악한 운영 환경을 놓고 분석 중이다. 논란이 커지자 정부는 신규 ESS 사업장에 대해 설치 기준은 물론 한국산업표준(KS), 국가통합인증마크(KC) 등 안전 기준을 강화한다고 밝혔지만 ‘사후약방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실적 부진에 시달린 ESS 업계에 대한 파격적인 지원책이 나올지도 미지수다.

재계에서는 가동 중지 권고를 이행한 ESS 사업장에 한해 중지 기간만큼 전기요금 특례제도를 이월해주는 식의 지원 방안이 거론된다. 박정욱 산업통상자원부 제품안전정책국장은 “정부의 가동 중지 권고를 이행한 ESS 사업장에 한해 가동 중단 기간에 상응하는 특례요금 이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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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한 신재생에너지 목표 우려도

정부 대책 발표가 늦어지면서 ESS 업계 불만은 극에 달한 모습이다. 정부가 6월 초 사고 원인을 발표한다고 해도 안전 규제를 강화한 새 인증 절차 수립 등 관련 제도 정비는 빨라야 8월쯤 이뤄질 전망이다. 당분간 ESS 업체 수주 가뭄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ESS 업계 관계자는 “화재 사고로 신규 발주가 끊기면서 일감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정부가 하루빨리 수주할 만한 환경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차일피일 미루고 있어 답답한 상황”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무엇보다 ESS 보급 확대를 주도해온 정부가 정작 ESS 업계 위기는 나 몰라라 하는 것을 두고서도 말들이 많다.

ESS는 생산된 전기를 배터리에 저장했다가 전력이 필요할 때 방출하는 설비다. 정부는 2017년 6월 탈원전을 공식 선언한 이후 ESS 보급을 늘려왔다. 원전을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로 대체하기 위해서는 전기를 저장·전송하는 장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태양광 발전은 원전과 달리 기상 조건에 따른 발전량 변동 문제가 있어 에너지 저장시설이 필수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짧은 시간에 ESS 보급량을 대폭 늘리다 보니 안전 문제를 등한시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진다. ESS 안전 기준조차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국에 태양광 발전시설을 급격히 늘린 데 따른 후유증이란 우려다. 정용훈 카이스트 원자력·양자공학과 교수는 “정부로서는 원전 대신 하루 평균 가동 시간이 4시간 안팎에 그치는 태양광 발전을 늘리려다 보니 ESS를 확대할 수밖에 없었다. 태양광을 무리하게 보급한 것이 중요한 원인”이라고 꼬집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최근 공개한 제3차 에너지기본계획안에서 2040년까지 재생에너지를 30~35%로 높이겠다는 거창한 목표를 내놨다.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ESS 화재 원인도 제대로 밝히지 못한 상태에서 신재생에너지 비중만 계속 늘릴 경우 ESS 관련 각종 부작용이 커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전문가들은 국내 ESS 업체 피해를 줄이려면 정부가 서둘러 화재 원인 결과를 내놓고 ESS 보급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고 조언한다. 신재생에너지 목표 달성을 위해 무작정 ESS 보급을 늘리는 정책부터 재고해야 한다는 의미다. 정용훈 교수는 “정부가 기업 공장뿐 아니라 아파트 같은 주거시설에도 ESS를 대거 공급할 계획인데 화재가 발생할 경우 대형 인명 사고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고 밝혔다.

ESS 업계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책도 절실하다. 미국 기술조사기관 내비건트리서치에 따르면 전 세계 ESS 시장은 2017년 42조5000억원에서 2020년 58조6000억원 규모로 급성장할 전망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국내 업체 점유율을 높이려면 기술력 높은 기업에 대한 지원 방안이 필요하다. ESS 보조금 정책이 활성화된 미국 등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ESS 보조금 지급 기한이 대부분 내년이면 끝난다. ESS 특례요금제도는 2020년 일몰을 앞둔 상태다. 이에 비해 미국은 ESS 보조금인 ITC(Investment Tax Credit)를 내년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ESS 화재로 가동이 중단되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산 배터리 신뢰도가 떨어지고 있다. 하루빨리 명확한 안전 기준을 마련하고 ESS를 원활히 가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업계 관계자 얘기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김경민 기자 kmkim@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08호 (2019.05.15~2019.05.2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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