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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이벤트보다 노동자를 대우하는 게 노사관계에 더 중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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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준석 한국남동발전 영흥발전본부 본부장(오른쪽)이 MK노사관계 우수기업 인증서 전달식에서 노조위원장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제공 = 한국남동발전 영흥발전본부]


10여년 전부터 대기업을 중심으로 재계에는 일명 '직급·호칭 파괴' 바람이 불고 있다. 수평적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해 직급을 간소화하고, 선후배 직원들 사이의 호칭도 상하관계를 나타내지 않도록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직급·호칭 간소화를 정착시키지 못하고 과거로 되돌아간 기업도 적지 않다. 한화그룹과 KT는 각각 지난 2012년과 2009년 호칭을 '매니저'로 통일했지만, 결국 원래대로 되돌아갔다. 취업포털 사람인에 따르면 호칭파괴 제도를 도입한 112개 회사 중 25%는 실효성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내기도 했다. 호칭·직급을 파괴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더라도 조직 내의 '상명하복'식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소용이 없을 수도, 오히려 부작용이 클 수도 있다는 방증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조직관리와 관련한 기존 제도를 크게 손보지 않고 운영하더라도 조직원들 상호 간의 태도가 바뀌면 수평적 조직문화를 정착시킬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실제 유준석 한국남동발전 영흥발전본부 본부장은 작년 취임한 뒤 2년째 조직을 이끌면서 기존 조직관리 제도를 크게 고치지 않고도, 자신과 직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소통하는 이벤트에 소극적이고도 수평적 조직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 같은 성과를 인정받아 남동발전 영흥발전본부는 이달초 MK노사관계우수 인증을 받았다.

최근 인천 옹진군 영흥면 남동발전 영흥발전본부에서 만난 유준석 본부장은 "부서장 이하 (직급의)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일을 할 여건을 만들어주는 게 본부장이 할 일"이라며 인증의 비결을 설명했다.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일을 할 여건'이란 직급이 낮은 직원들이 낸 좋은 의견도 묵살되지 않고 실제 경영에 반영되는, 대기업들이 '직급·호칭 파괴' 제도를 통해 얻고자 한 목표다.

이를 위해 유 본부장은 이전까지는 차·부장으로부터 받던 보고를 실무 직원들로부터 직접 받은 뒤 결재한다. 또 직원을 본부장실로 불러 업무와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실제 이 자리에서 한 직원이 제안한 안전과 관련된 부품에 대한 의견을 납품실에 전달해 업무에 반영하도록 한 적이 있다고 유 본부장은 전했다.

그는 직원들이 강제로 동원될 가능성이 있는 본부장과의 소통 이벤트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틀에 박힌 대화가 오가는 기회의 횟수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라는 생각에서다. 유 본부장은 자신에게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직원들만 스스로의 의지로 참여하는 '번개팅(즉흥적 모임)'을 자주 만들고 있다.

형식보다 실질적 소통에 집중하는 유 본부장의 태도는 노조와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본부장으로 취임한 뒤 노조와 만나 대화하는 '역지사지 회의'를 만들었지만, "요즘 (회의가) 뜸하다"고 말했다. 대신 매달 개최하는 노사협의회, 산업안전보건위원회, 사택복지위원회 등 기존에 도입돼 있던 회의에서 실질적인 노사협의가 이뤄지도록 하고 있다.

유 본부장은 "(취임 초기에) 노조가 제안한 안건이 실무진 수준의 검토만 이뤄질 뿐 부서장은 공부도 안 하고 회의에 들어가는 데 대해 많이 질책하기도 했다"며 "(지금은) 모든 안건을 부서장이 직접 검토하고 필요하면 (회의가 열리기 전이라도) 직접 노조를 만나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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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놀거리가 없는 젊은 직원들을 위한 시설이 필요하다는 노조의 제안을 받아들여 설치된 스크린야구장. [사진 제공 = 한국남동발전 영흥발전본부]


노조를 경영 동반자로 대우한 결과 남동발전 영흥발전본부는 협력적 노사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사측은 노조의 사택입주 순위 산정 기준 변경과 젊은 직원을 위한 여가 시설 설치 등의 요구를 받아줬고, 노조 측은 주당 근로시간을 52시간으로 제한하는 법안이 시행된 뒤 인력부족에 시달리는 사측을 위해 인피로 제외되는 조합원을 교대근무 예비 명단에 편성하도록 수용했다.

이 같은 노사관계를 만들기까지 20여년의 세월이 필요했다고 한다. 지난 2000년대 초만 해도 남동발전 영흥발전본부는 악화된 노사관계, 이로 인한 잦은 설비사고 등으로 기피사업소로 꼽혔다. 특히 지난 2003년 민영화 추진 때부터 악화된 노사 관계는 2009년 노조의 순환파업 돌입, 2014년 공공부문 노동개혁 추진 등으로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불건전 노사 관행을 개선하고 원칙에 따른 노사 관계를 만들어 사회적 책임을 다하자는 데 공감대를 형성한 노사가 대화를 이어가면서 시뇌를 형성하게 됐다고 유 본부장은 설명했다. 그는 "(노사 관계를 회복시킨 건) 하나의 이벤트가 아니다. 꾸준히 서로 대접하고 협조한 게 쌓인 결과"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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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남동발전 영흥발전본부 임직원들이 MK노사관계 우수기업 인증서 전달식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제공 = 한국남동발전 영흥발전본부]


[디지털뉴스국 한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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