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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노무현의 정치유산…지지층 반대에도 `외로운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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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4년 12월 8일 이라크 북부 아르빌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자이툰 사단을 전격 방문해 우리 장병들과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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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지난 1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시민문화제'에서 "아직 노무현의 시대가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도 '노무현의 시대'를 살지 못했고, 문재인 대통령도 아직 '노무현의 시대'에 이르지 못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시대와의 불화'는 노 전 대통령의 숙명이었다. 그리고 그는 숙명과 맞선 정치인이었다.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아름다운 패배'를 선택했고, 권위주의 청산을 위해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았으며, 민주주의의 제도적 완성을 위해 실패를 무릅썼다. 참여정부의 주축 세력이 현 정부에서도 큰 국정을 사실상 주도하고 있지만 '대통령 노무현'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는 것도 사실이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정치인 노무현'이 남긴 유산은 아직도 유효하며 현재 정치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팬클럽 정치'의 개막

2000년 4월 13일 노 전 대통령은 16대 총선에서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해 고배를 마신다. 정치 1번지 서울 종로 보궐선거로 15대 국회에 입성한 그는 모두의 반대에도 부산 출마를 강행했다.

그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지만 '지역주의 타파'라는 그의 정치적 숙제를 풀기 위해 도전했다. 그는 '가능성'으로 움직이는 정치인이 아니라 '당위성'으로 움직이는 정치인이었다. 실패할 수도 있지만 옳은 길이라고 여겼기에 그는 그 길을 걸었다.

그의 '아름다운 패배'는 그의 정치적 성공의 자양분이 됐다. 선거 결과에 분노하고 그의 도전을 응원하던 사람들은 PC통신이 흔하던 시절인 2000년 온라인을 통해 의기투합했고, 그래서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태어났다.

결성 초기에 500명이던 노사모 회원은 불과 2년 뒤인 2002년 8월 5만여 명으로 급증했다. 당시 등장한 팬덤 정치는 오늘날 한국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확산과 맞물려 결속력 강한 지지층이 등장했고, 이들이 여론을 주도하며 정치에도 파급 효과를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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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이익 위해 과감한 결단

노 전 대통령은 강력한 지지자 그룹을 보유한 정치인이었지만 결코 지지자들만 보고 정치를 하지 않았다. 지도자라면 지지자들이 반대하더라도 국가 생존과 이익을 위해 과감하게 결단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외로운 결단'을 여러 차례 내렸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이라크전쟁 파병 등은 대통령으로서 국가 생존과 이익을 위해 내린 '원칙주의'의 결과물이었지만 이는 지지층 중 진보적 색채가 강한 이들의 등을 돌리게끔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특히 한미 FTA로 인해 진보 진영에서는 정권 말기의 그를 '친미·신자유주의자'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6년 3월 '국민들과의 인터넷 대화'에서 "참여정부를 새롭게 정의한다면 좌파 신자유정부"라고 말했다. 국가와 공동체를 위한 일이라면 좌파 정책이든 우파 정책이든 상관 않고 시행할 수 있다는 그의 실용주의적 면모를 드러낸 발언이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의 '좌파 신자유정부'라는 자기 규정은 좌파든 우파든 '도그마'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경고로 읽힌다. 그는 "뭐든지 획일적인 이론적 틀 안에 현실을 집어넣으려 하지 말고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해법에 좌파 이론이든 우파 이론이든 해결하는 열쇠로 써먹을 수 있는 대로 써먹자는 것이며, 그것은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말은 현재도 여전히 유효하다. 공약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정책으로 실행했을 때 부작용이 드러나면 과감하게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그것이 지도자의 '외로운 결단'이고, 우리 사회는 지금 그러한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분노의 정치와 비주류의 중용

노 전 대통령 곁을 오래 지킨 윤태영 전 청와대 부속실장은 재임 시절 노 전 대통령이 했던 이야기를 전했다. "'내가 옛날에는 분노 때문에 이걸, 정치를 시작했다'고 얘기하는데 지금은 거꾸로 나를 보면서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게 참 아이러니한 일인데, 나는 지금은 대화와 타협 그다음에 공존을 모색해야 되는 그런 대통령 자리에 있다." '분노'는 노 전 대통령이 정치를 시작한 이유이기도 했고 그가 강력한 지지자 그룹을 갖게 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는 '분노'를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지배세력을 교체하고자 했다. 386 운동권 출신, 시민단체 출신 등을 파격적으로 기용하는 인사 실험을 선보이며 과거 기득권 세력과 차별된 모습을 보인 것도 이 같은 맥락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분노의 정치'가 한국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긴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보수와 진보세력의 간극은 커졌고, 정치적 중간지대가 사라졌다. 이로 인해 양 진영 간 대화와 타협의 가능성도 낮아졌다. 국회에서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실종된 것도 상대 진영을 적으로 여기는 '분노의 정치'가 현재까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집권 3년 차를 맞은 문재인 대통령이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사청문회에서 논란이 됐던 후보들 임명을 강행한 것을 놓고 일부에서는 '적폐 청산'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편 가르기 정치에 몰두한다는 비난도 제기한다. 참여정부에서 중용됐던 인사들 가운데 상당수는 현 정부에서도 국정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탈권위주의 실험은 현재도 진행형

노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국가정보원, 검찰, 경찰 등 권력기관의 제자리 찾아주기에 착수했다. 권력기관들이 정치권 입김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당시 민정수석을 두 번이나 역임한 문재인 대통령이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신설, 검경 수사권 조정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추진하고 있는 것도 사실상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유업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탈권위주의적 일화는 수도 없이 많다. 자이툰 파병 부대를 방문했을 당시 반가운 마음에 한 병사가 다가가자 경호원이 제지했는데, 그는 괜찮다고 하면서 경호원들을 물렸다고 한다. 이 병사는 노 전 대통령에게 걸어가 "포옹 한번 해주시면 가문의 영광으로 받겠습니다"고 말했고, 그는 두 팔을 쫙 벌리는 것으로 화답했다. 이때 찍힌 사진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탈권위주의는 1988년 국회 본회의장 발언에 잘 녹아들어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 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한다"며 "노동자와 농민이 다 함께 잘살게 되고 임금 격차가 줄어서 굳이 일류 대학을 나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리고 높은 자리에 안 올라가도 사람 대접받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면…"이라고 말했다.

[김명환 기자 / 홍성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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