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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매경포럼] 미국 사용 설명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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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벌써 십수 년 지났지만 워싱턴 특파원 경험은 이후 한미 관계 분석에 많은 도움을 준다. 3년이니 길 수도 혹은 짧게 보일 수도 있다. 여하튼 덕분에 조금 더 깊게 혹은 사안의 뒷면을 볼 눈을 얻었다. 그때 만난 외교관이나 타 부처 파견관과의 교류는 길게 이어졌다. 한미 관계에 관해 이들과 나눈 얘기에서는 공감하는 대목이 많다.

미국은 철저하게 시스템과 매뉴얼로 작동하는 사회다. 외교에서도 그렇다. 주변부에서 놀던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등극해 트위터와 여론몰기로 대중을 끌고 간다. 그러나 국무부나 국방부 같은 관료 조직에서는 묵묵히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이들이 자리를 지킨다. 트럼프의 결정과 지시에 쏠려 따라다니는 듯 보이지만 한발에 훌쩍 건너뛰는 일은 쉽게 생기지 않는다.

지난 1년간 이어진 미국과 북한 간 밀고 당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은둔의 지도자였던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미국은 상당히 파악했을 게다. 두 번의 트럼프·김정은 회담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별도 접촉 등 기회가 많았다. 김 위원장의 다음 수를 읽어내기 위해 정보분석팀을 가동하고 각 분야 전문가들이 동원돼 연구했을 게다. 이젠 김 위원장에게 매달리지 않을 듯하다. 하노이 회담에서 여실히 보여줬다. 그의 행태와 사고를 나름대로 파악했으니 김 위원장이 먼저 나서도록 유인하는 판을 깔 것이다. 북한이 노출한 약점이나 민낯에 대한 미국 쪽의 치밀한 분석이 이뤄졌을 것이라는 전제하에서다.

한미 관계에서도 철저하게 시스템 속에 움직이는 미국에 비해 쉽게 생각하고 덤비는 우리의 모습이 대비된다. 문재인정부는 외교부 본부 내 미국 관련국과나 주미 대사관에서 일하던 이른바 북미스쿨 멤버들을 상당수 교체했다. 백악관이든 국무부든 미국 쪽 상대와 처음 만나 인사부터 해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톱다운 방식이니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를 전달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큰 오산이다. 경험 많은 외교관의 얘기를 들어보면 미국 쪽 상대들을 다루는 건 결코 만만하지 않다. 그는 "남녀가 연애할 때처럼 팽팽하게 밀당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고받는 문서나 전화에 갑자기 쓰지 않던 단어가 등장하면 어떤 의도인지 찾아내야 한다.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하루든 이틀이든 일정한 패턴대로 반응이 오지 않으면 뭔가 잘못 가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실무자로부터 과장·국장을 거쳐 차관보와 부장관·장관에게 단계를 밟아 제대로 보고가 됐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우리 의견을 국무부나 백악관에 건네면 얼마 만에 반응이 오는지 정확하게 세봐야 한다. 그들은 기계적으로, 좋게 말하면 수학적으로 일을 처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촘촘한 과정 위에서 지극정성을 들여야 겨우 실이 꿰어지는 게 대미 외교라는 얘기다.

주미 대사관을 거쳐 다른 지역에서 두루 근무한 외교관의 조언도 귀담아들을 만하다. 미국의 해외 주둔 병력 운용과 원칙을 보면 큰 그림을 볼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처럼 전쟁을 치렀던 상대에 적용하는 미국의 전략전술과 행동 패턴에서 북한에 적용하는 숨은 전략을 찾아낼 수 있다는 조언이다.

워싱턴 외교가에는 미국 주류세력과 친분 관계를 가진 이를 대사로 보내는 경우가 많다. 미국 제16대 연방대법원장을 지냈던 윌리엄 렌퀴스트와 사냥 친구라는 점 때문에 당시 주미 일본대사가 7년이나 재임했던 건 유명한 사례다. 사람 관계에서 먼저 시작해 국가 관계로 발전시켜 나간다. 일본은 총리부터 주재 대사와 일등서기관까지 푸들 외교라는 조롱까지 들으며 미국 쪽 상대의 비위를 맞춰주고 나서 자기들이 원하는 걸 얻어낸다. 우리는 정권이 바뀌면 벌어지는 싹쓸이에 가까운 담당자 교체 때문에 개인적 친분은커녕 새롭게 인사 나누기에 급급하다. 그러다 보니 미국 전문가를 키워낼 기회가 없다. 외교부에, 넓게는 대한민국에 미국을 잘 아는 한국 사람이 많은 듯이 보인다. 하지만 아쉽게도 엄밀히 따지면 미국 전문가를 손에 꼽기 쉽지 않다. 이 글도 한두 단면만 잘라서 본 미국 사용 설명서다. 아무리 잘 써야 50점짜리도 되기 어려운 걸 알지만 감히 꾸며봤다.

[윤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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