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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삶은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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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생각] 정인경의 과학 읽기

한겨레

모든 것은 그 자리에
올리버 색스 지음, 양병찬 옮김/알마(2019)

올리버 색스가 세상을 떠난 지 4년째 접어들었다. 그 사이에 나는 과학책을 셀 수 없이 사들이고 읽고 치워버리길 반복했다. 하지만 책상 위에 꽂혀 있는 올리버의 책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눈길로 어루만지며 아직 작별 인사를 못하고 있었는데 반갑게도 그가 남긴 글을 모아 <모든 것은 그 자리에>가 출간되었다. 이 책을 읽노라니, 그가 없는 세상이 잘 굴러가는 듯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얼마나 허전했는지 실감이 났다.

올리버 색스는 자연과 과학을 아끼고 사랑한다. 험프리 데이비와 찰스 다윈, 허버트 조지 웰스를 존경하고, 주기율표의 원소와 정원의 꽃을 탐닉한다. 그의 과학에 대한 열정은 오랑우탄, 양치식물, 은행나무, 갑오징어 등 사소한 것 하나 놓치는 법이 없다. 개별적인 사물이나 특별한 사건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늘 과학적 통찰로 이어진다. 가령 태양중심설을 말하는데 기원전 3세기 아리스타르코스와 17세기 뉴턴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단순히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알려준다. 과학을 좋아하면 삶의 태도가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를 느낄 수 있도록.

“죽어갈 때 저런 밤하늘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별을 보며 위로받는다. 어린 시절 상실의 순간에 수학의 숫자에 의지했고,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원소와 물리학이 친구가 되어주었다고 고백한다. 그의 인생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자연의 법칙은 때때로 나약해지는 마음을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 이렇게 삶의 층위가 겹겹이 쌓여 있는 글쓰기에 더욱 감동을 덧대는 것은 세상을 향한 다정하고 연민 어린 시선이다. “의사로서 잘못된 취급을 받거나 하찮게 여겨지는 환자들에게 마음이 가는 내 성격”은 책마다 등장하는 “나의 환자들”의 고통을 지나치지 못한다. 그는 언제나 환자의 고유한 능력을 찾아서 복원해 놓고야 말았다.

<모든 것은 그 자리에>에도 가슴을 울리는 문장이 많이 나온다. “우리는 지혜를 배울 수 없다.” “우리는 여행하는 동안 지혜를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우리의 여행을 대신할 수 없으며, 우리의 수고를 덜어줄 수도 없다.” 프루스트의 말을 빌려서 올리버 색스는 삶의 경이로움과 가치를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혜는 지식이 아니다. 지식은 누가 가르쳐줄 수 있지만 지혜는 그럴 수 없다. 과학적 지식을 단지 쓸모로 배우는 사람이 많지만 올리버 색스는 과학을 지혜의 경지로 드높였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위하는 ‘좋은 과학’이 있다고 믿는다.

“요즘 ‘좋은 과학’이 전례 없이 번성하고 있으며, 훌륭한 과학자들이 앞장서서 조심스레 서서히 움직이며 지속적인 자기 검증과 실험을 통해 통찰력을 점검 받고 있다. 나는 좋은 글쓰기·미술·음악을 높이 평가하지만, 품위, 상식, 선견지명, 불행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 같은 인간의 미덕을 바탕으로 수렁에 빠진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은 과학뿐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까지 그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인류와 지구는 생존할 것이고, 삶은 지속될 것이다.” 진정 현재를 사랑한 사람만이 미래를 신뢰할 수 있듯이.

정인경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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