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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보노보의 몸을 빌려서라도, 미치도록 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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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3년 만의 신작 ‘진이, 지니’

보노보 몸속에 들어간 사육사

판타지 형식에 담은 묵직한 주제



한겨레

진이, 지니
정유정 지음/은행나무·1만4000원

“나는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손바닥을 맞붙이고, 마지막 순간에 손을 빼버리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깍지를 꼈다. 순간, 내 몸이 꿈틀 움직이며 손을 맞잡아오는 느낌을 받았다.”

정유정의 소설 <진이, 지니>의 종결부다. 같은 일인칭 단수대명사인 ‘나’와 ‘내’가 분리되어 두 개의 서로 다른 실체인 것처럼 묘사된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 문장들에 이 소설의 비밀이 숨어 있다.

<진이, 지니>는 생물학도이자 사육사인 진이와 보노보 지니의 종을 넘어선 교감과 생사를 넘나드는 드라마를 그린다. 교통사고를 당해 가사 상태에 빠진 진이의 영혼이 사고 현장에 함께 있었던 보노보 지니의 몸 속으로 들어간다는 설정은 에스에프(SF)적이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까워 보인다. 전작들에서 주로 추리나 스릴러의 틀을 빌려 인간의 본성과 악의 문제를 탐구했던 정유정으로서는 커다란 변신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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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진이의 영혼과 지니의 육신이 결합했다가 그 결합이 끊기기까지 5월의 사흘을 배경 삼지만, 진이와 지니의 사흘에는 7개월을 거슬러 오르는 전사(前史)가 있다. 그 전해 10월 진이는 콩고 킨샤사에서 철장에 갇힌 어린 지니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밀렵꾼들에게 잡힌 지니는 철망을 사이에 두고 진이의 검지 손가락을 붙잡았거니와, 앞서 인용한 소설 종결부에서 지니의 육신에 깃든 진이의 영혼이 가사 상태인 자신의 손을 깍지 끼는 행위는 7개월 전 킨샤사에서의 스킨십을 기묘한 방식으로 반복하는 셈이다.

어린 지니가 처음 만난 진이의 손가락을 움켜쥔 것은 일차적으로는 천둥과 번개로 인한 두려움 때문이었지만 그 심층적 메시지는 밀렵꾼들 손아귀에서 자신을 구출해 달라는 구조 신호였다. 그러나 진이는 곤란한 일에 연루되기 싫다는 생각과 신변 위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 신호를 못 본 척 현장을 빠져 나오며, “돌아보지 않았다.” 이 일이 남긴 죄책감은 나중에 진이의 마지막 선택에 결정적 구실을 한다.

진이가 위기에 빠진 지니를 두고 나오며 “돌아보지 않았”던 장면은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인 청년 백수 민주의 기억과도 공명한다. 공익 요원으로 구청 사회복지과에 근무하던 10년 전, 그는 방 안에서 죽어가던 노인의 신음 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척 지나치며, “돌아보지 않았다.” 취직 시험에 거듭 실패한 끝에 집에서 쫓겨난 민주가 지니의 육신에 깃든 진이의 ‘구조 신호’에 응답해 제 일처럼 위험을 무릅쓰게 된 것 역시 10년 전 기억이 남긴 죄책감과 무관하지 않다. 소설 <진이, 지니>를 진이와 민주의 두 겹의 성장소설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정유정은 본래 다른 소설을 쓰기 위해 줄거리를 짜고 자료 조사도 거의 마친 상태에서 갑자기 방향을 틀어 이 소설 <진이, 지니>를 쓰게 됐다고 밝혔다. 러셀의 책을 읽다가 마주친 문장 때문에 29년 전 돌아가시기 직전 의식 불명 상태였던 어머니의 사흘에 생각이 미쳤고, 내처 ‘생의 가장 치열했던 사흘에 대한 이야기’를 쓰자고 마음 먹었다는 것.

지니의 육신을 빌린 진이는 민주의 도움을 받아 병원에 누워 있는 제 몸과 결합하고자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꾼다. “지니의 몸을 무단 점령하고 정신마저 빼앗”은 자신의 몰염치와 폭력성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지니 앞에 엎드려 애원해서라도, 살고 싶었다. 너의 생을 내게 양보해달라고 떼를 써서라도 살고 싶었다”던 진이가 끝내 제 욕심을 버리고 지니의 삶을 편들기로 하는 선택을 작가는 ‘성숙한 자유의지’라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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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우연에 의해 태어났고,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갑니다. 그 시간이 오기 전에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운명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요? 죽음 앞에 선 진이의 선택이 민주에게는 삶의 희망과 가능성이 되었으면 했어요.”

22일 서울 마포구 은행나무출판사에서 만난 작가는 “<28>의 주인공인 119 구조대원 한기준이 여전히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며 살고 있다는 뒷이야기도 <진이, 지니>에서 만날 수 있다”고 귀띔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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