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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딸들에게 무엇을 물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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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우리가 딸들에게 해줘야 할 말들-우리 앞에 놓인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멜리사 벤 지음, 정해영 옮김/오월의봄·2만4000원


페미니즘 시대이자 백래시의 시대, 부유한 여성 기업인의 성공담과 빈곤한 여성 비정규직의 위기감이 교차하는 시대. 이 혼란스러운 희망과 좌절의 시대, 다음 세대의 여성들에게 무엇을 ‘유산’으로 남겨줘야 할까?

<우리가 딸에게 해줘야 할 말들>은 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교육 활동가인 멜리사 벤이 쓴 여성문화비평서다. 기성세대인 엄마의 눈으로 오늘날 젊은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진단하고 딸들의 미래를 냉정하게 예측했다.

유명 좌파 정치인 아버지와 교육운동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자란 지은이는 런던정경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연구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한 스튜어트 홀 밑에서 연구를 진행했다고 한다. 그래선지 좌파 페미니스트로서 그의 주장은 무척 냉소적이고 선명하다. <도둑맞은 페미니즘>에서 여성주의 언어를 훔쳐 가부장적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는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한 철학자 니나 파워, 인정투쟁보다 재분배를 강조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낸시 프레이저와 비슷한 견해를 보인다고 할까.

지은이는 스포츠웨어나 명품 요가복 광고에 등장하는 활달한 여주인공이나 자아성찰적인 ‘패셔니스타’ 이미지가 빈곤하고 위기에 처한 다수 여성들의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높은 학업성취도로 성공한 여성 스토리 이면엔 경기침체와 긴축재정에 고통받는 젊은 여성 다수의 삶이 있다는 것이다. 정부의 예산 삭감은 맨 먼저 육아 관련 복지 혜택과 가정폭력 피해 지원 서비스 축소를 불렀다. “딸들을 위해 내가 원하는 것은 주택, 무상교육, 고용인데 그 모든 것이 거부당하고 있다.”

지은이의 주장에 석연찮은 면도 있다. 자녀에게 엄격한 아시아 이민자 엄마(타이거 맘), 교육열이 지나친 한국의 중산층 엄마 들을 걱정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만큼 아시아 여성에 대한 은근한 비하나 경멸이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여성의 빛나는 성공담이 저소득층 여성의 현실을 다룬 르포보다 인기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자칫 여성 대 여성의 대결구도로 읽힐까 우려된다. 남성의 가사노동 책임은 쏙 뺀 채 돈으로 가사와 돌봄노동을 외주화하는, 맞벌이 여성만 문제로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책이 가진 냉철함은 큰 미덕이다. <린 인>을 쓴 여성 기업인 셰릴 샌드버그가 여성에게 야망을 가지라고 끝없이 촉구하지만 그런 지위는 특별한 행운 없이 불가능하다는 공허한 사실, 성공을 위해 일에 몰두하라는 담론이 노동의 소외를 모른 척하며 가부장적 자본주의를 지탱한다는 불편한 진실, ‘그들만의 리그’에 배제된 이들이 처한 냉정한 현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제안은 여전히 값지다. “페미니스트들은 정치권력 및 경제권력의 본성에 대한 비판에 다시 관여할 필요가 있다. (…) 정치나 공적인 논의를 우리의 아버지나 남편, 오빠나 남동생, 아들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 성폭력에 대한 조치, 불평등과 빈곤에 대한 조치 모두가 딸들에게는 필요하다. 빵과 장미 모두 필요하듯이.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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