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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책과 삶]'스릴러의 여왕' 정유정, 리얼리티 넘치는 판타지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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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장편소설 <진이, 지니>를 선보인 소설가 정유정을 지난 21일 서울 마포구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만났다. 인간과 보노보의 영혼이 공존하는 ‘호미노이드’가 등장하는 판타지 소설에서 정유정은 “내가 살아온 삶을 인정하고 포기하지 않고 나로서 죽겠다는 것, 그것을 할 수 있는 성숙한 인간을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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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마지막 사흘에 대한 소설을 쓴다면 어떨까. 삶에 대한 회한 넘치는 반추나 고백이 될 수도, 죽음과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정유정(53)이라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평단과 독자로부터 ‘이야기꾼’이라고 호명되는 정유정은 이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영장류 보노보의 몸 속으로 들어간 인간의 영혼이 자신의 육신과 삶을 되찾기 위해 사흘간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 박진감과 흡입력 넘치는 판타지 액션 어드벤처 소설 <진이, 지니>(은행나무)가 정유정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정유정은 한국 문학의 예외적 작가다. 단편 중심의 창작 풍토에서 벗어나 오로지 장편 소설만 썼다. 문단의 평가 보다는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7년의 밤>이 55만부, <종의 기원>이 25만부, <28>이 24만부 나가는 등 기본 20만부 이상 팔리는 작가다. ‘K스릴러’의 선두주자로 해외 20여개국에 판권이 팔리며 세계적 작가로 도약했다. <7년의 밤> <종의 기원>에서 스릴러를 선보였다면 신작 <진이, 지니>에서 정유정은 ‘이런 이야기도 할 수 있다’는 듯 판타지를 들고 왔다. ‘이야기꾼’ 답게 그는 능수능란하게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지난 21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정유정을 만났다.

“죽음은 언젠가는 다뤄야 할 문학적 테마였어요. 죽음에 대한 공포심과 두려움, 트라우마가 있거든요. 어머니가 제가 25살 때 돌아가셨어요. 어머니의 죽음은 인생에서 치유할 수 없는 상처 같은 것이었어요. 작가들이 죽을 때까지 몰두하는 테마가 있는데 저는 인간의 악한 본성과 자유의지예요. 자유의지가 죽음 앞에서도 유효할까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죽음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지는 결정할 수 있잖아요.”

<7년의 밤> <28> <종의 기원>이 인간의 악한 본성을 파고드는 소설이었다면,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와 <내 심장을 쏴라>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그린 성장소설이다. <진이, 지니>는 후자의 연속선상에 위치한다. 정유정은 “자유의지란 인생에서 뭘 원하는지 알고, 그것에 내 삶을 던질 수 있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진이, 지니>는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 묻고 답한다.

소설은 어머니의 죽음에서 비롯됐다. 29년 전 간호사였던 정유정이 근무하던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가 중환자실로 내려왔다. 의식이 없는 어머니는 그 상태로 사흘을 보내다 돌아가셨다. 미동도 없는 어머니를 향해 물었다. “엄마, 어디 있어?”

“다른 소설을 쓰던 중 갑자기 29년 전 어머니의 마지막 사흘이 생각났죠. 그때 엄마의 영혼은 어디에 가 있을까 생각하다보니 600만년 전 인간과 침팬지, 보노보가 분화되기 전의 영장류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보고 있을까 궁금해졌어요. 나의 태초의 원형을 보고싶단 생각이 들었죠. 태초의 땅에서 온 존재와 현실에 있는 주인공의 영혼이 교차하는 이야기를 써보면 어떨까 하다보니 순식간에 스토리와 제목이 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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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을 먹고 있는 보노보의 모습. 사진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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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팬지 사육사인 주인공 진이는 콩고에서 보노보를 보고 난 후 ‘운명적 사랑’에 빠진다. 진로를 바꿔 보노보를 연구하기로 마음먹지만 보노보는 또다른 방식으로 그녀의 삶의 키를 틀어버린다. 콩고를 떠나기 전 들린 기념품 가게에서 밀렵꾼에게 잡힌 보노보와 마주쳤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눈길을 무시하고 도망쳐 버린 것이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던 진이는 동물과 관련된 일을 포기하려 한다. 그러나 시골의 한 산장에서 밀수된 보노보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자 진이는 결국 보노보를 구조하러 간다. 구조한 보노보에게 ‘지니’라는 이름을 붙여주지만 영장류센터로 데려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진이의 영혼은 보노보의 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 필사적인 모험을 벌인다.

정유정이 처음 염두에 둔 건 침팬지였다. 그는 “영장류를 공부하다보니 수컷 중심의 서열 문화가 강하고 공격적인 침팬지보다는 공감능력과 협동력이 뛰어난 암컷 중심의 보노보가 적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보노보의 DNA는 98.7%가 인간과 일치해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체 보노보에 빙의한 인간 영혼이라니. 현실과 거리가 너무 먼 판타지다. 정유정은 “심리적 존재와 육체적 존재가 다르다는 설정은 판타지가 아니고는 불가능했다”며 “판타지를 독자들이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선 현실에 확실히 발을 딛고 있어야 한다. 리얼리즘 소설보다 리얼리티가 더 뛰어나야 했다. 이를 위해 보노보 연구와 취재를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정유정은 취재를 위해 일본 구마모토 생추어리, 베를린 동물원에 직접 가 보노보를 관찰했다.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 서울대공원 우경미 사육사 등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 멸종위기종인 보노보는 콩고 밖으로 반출이 불가능하지만, 기존에 나와 있던 100여마리는 일본, 독일, 미국 등지에 흩어져 있다. 보노보를 관찰하면서 그 또한 보노보에게 반했다. “깊고 예민한 감수성, 높은 지적 능력, 풍부한 표정…가까이 다가와 탐색하듯 응시하다가, 어느 순간 내 안으로 훅 미끄러져 들어오는 검은 눈은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마저 잊게 했다”는 진이의 말은 작가 자신의 말이기도 하다.

디테일한 묘사에 능한 정유정은 보노보의 외양, 몸짓 하나하나를 사실적이고 역동적으로 그려낸다. 지니의 눈동자와 표정, 움직임이 눈 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마치 영화 <혹성탈출>에 나오는 침팬지를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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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유정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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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의 이야기가 죽음으로 가는 모험이라면, 다른 한 축은 무기력한 청춘 김민주의 성장 스토리다. 나이 서른까지 부모에게 얹혀 살던 민주는 집에서 쫓겨나고,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무기력하게 살아간다. 부모가 자신을 비난할 때 쓰는 ‘간장종지’란 말에 자신의 삶의 반경을 가두었지만, 우연히 만난 보노보 진이(지니)가 자신의 몸을 찾도록 도와주는 과정에서 삶의 의미와 능동성을 찾아간다,

진이가 “내 삶에서 유일무이하고 전적인 존재, 나 자신과 헤어지는 게 미치도록 무서웠다…삶의 한가운데에 죽음이 있다는 걸 인정했더라면, 운명에 분노하는 대신 이것이 그저 내게 주어진 패라는 걸 인정할 수 있었을까”라며 죽음 앞의 두려움을 토로한다면, 민주는 진이를 통해 “그녀는 내게 삶이 죽음의 반대말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삶은 유예된 죽음이라는 진실을 일깨웠다…나는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삶을 가진 자에게 내려진 운명의 명령이었다”고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진이와 지니의 영혼이 한 몸에서 교차하는 동안, 두 의식의 경계는 점점 흐려지고 동화되어 간다. 지니의 과거를 보게 된 진이는 비로소 “인간에 의해 인간들 속으로 끌려 나온 후, 인간으로 인해 생사의 질곡을 넘나들고 인간을 위한 쾌락의 도구가 되었다가 자신을 통째로 강탈당해버린 지니의 삶”을 직시하게 된다. 나의 삶이 중요하다면, 지니의 삶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공감을 통한 공존의 휴머니즘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정유정은 재난소설 <28>에서도 개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간 바 있다. 그는 “간호사로 중환자실과 응급실에서 일하며 숱한 죽음을 마주하다보니 인간은 세계의 많은 생명체 가운데 하나라는 세계관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야기꾼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독자에게 선보이고 싶다”는 그에게 궁극적으로 쓰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물었다. “작가가 제시하는 낯선 세계에 들어가 함께 따라가다 보면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 온갖 감정의 격랑을 겪고 소설 밖으로 나오면 오래 여운이 남는 이야기.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아름답고 힘 있는 이야기”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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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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