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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김형규 기자의 한국 술도가] 진짜 ‘한국맥주’ 맛 보여줄게요··· 직접 농사지은 홉으로 만드는 제천 솔티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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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제천의 뱅크크릭 브루어리가 만드는 솔티맥주. 솔티는 소나무가 많은 언덕이라는 뜻의 마을 이름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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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홉 농사를 지어 수제맥주를 만든다는 양조장을 찾아 충북 제천의 산골짜기로 향했다. 소나무가 많은 언덕이라는 뜻의 솔티마을은 이런 데 맥주 양조장이 있을까 싶은, 평범한 시골 동네였다. 마을 이름을 딴 ‘솔티(SOLTI)맥주’를 만드는 회사는 ‘뱅크크릭 브루어리’. 둑과 내, 제천이라는 뜻이다. 지역성을 강조한 ‘마을 술’로 해외 시장까지 노리겠다는 포부가 읽혔다.

술맛도 원대한 포부만큼 특출할까. 대표 맥주인 ‘솔티8’부터 마셔봤다. 한 모금 삼키자마자 “이 술 뭐야, 이게 더블 IPA라고?” 소리가 튀어나왔다. 더블 IPA는 IPA보다 홉을 두 배로 넣어 쓴맛과 복잡한 향을 배가한 맥주다. 솔티8은 입에 머금는 순간 존재감을 과시하는 보통의 더블 IPA와 전혀 달랐다.

공이 울리자마자 강펀치를 마구 날리는 대신 슬슬 상대방 주먹을 피하다 결정적 순간 한방을 날리는 아웃사이더 복서 같았다. 팍 터지는 맛은 없었지만 씁쓰름한 매력이 은은하게 오래 입안에 남았다. 살짝 느껴지는 산미가 전체적인 균형도 잘 잡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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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태 뱅크크릭 브루어리 대표는 IT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프로그래머 출신이다. 독학으로 맥주 양조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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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뿐 아니라 술에 담긴 의미도 각별했다. 솔티8은 제천 출신 의병장 의암 류인석 장군을 기리는 맥주다. 의병 봉기에 쓰인 격문 ‘팔(八)도에 고하노라’에서 착안해 알코올 도수를 8도로 맞췄다. 하얀색 라벨 아래엔 “일본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죽는 편이 낫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방금 마신 쓴맛이 ‘나라 잃은 쓴맛’을 표현한 거라는 설명도 기막혔다.

수준급의 맥주를 만들고 근사한 이야기까지 입힌 홍성태 뱅크크릭 브루어리 대표(53)는 원래 잘나가는 프로그래머였다. PC통신 나우누리 창립멤버였고 외환위기 후엔 일본·홍콩·싱가포르·바레인·미국 등 해외를 15년간 돌며 일했다. 기술 변화가 빠른 정보기술(IT) 업계에서 ‘더 나이 먹으면 뭘 하나’ 고민은 자연스러웠고, 평소 좋아하는 맥주를 만들어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오랜 외국생활로 쌓은 다양한 맥주 경험을 든든한 자산으로 삼았다.

처음엔 독학을 했다. 세계 수제맥주 문화를 주도하는 미국에서 나온 책과 논문을 섭렵했다. 실무를 익히기 위해 일본·미국·영국·슬로베니아·벨기에 양조장을 돌아다녔다. 초청한 사람도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다. 무작정 찾아가 ‘같이 한 번 만들어보자’며 들이대는 식이었다. 나라마다 대접이 달랐다. 일본의 브루어리에선 그냥 쫓겨나기 일쑤였다. 미국 브루어들은 거리낌없이 양조장을 개방하고 함께 레시피를 토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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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태 대표는 일본·미국·영국·슬로베니아·벨기에 등 여러 나라에서 맥주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가 만드는 솔티맥주는 정통 벨기에 스타일을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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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배우고 싶었던 벨기에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 술의 핵심인 발효기술을 물으면 웃기만 하고 가르쳐주질 않았다. 홍 대표는 맥주 숙성실의 온도와 각종 조건을 꼼꼼히 메모하며 빈 부분을 상상했다. 그렇게 맞춘 퍼즐을 내놓을 때마다 벨기에 양조사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날마다 한 뼘씩 파고들어오는 홍 대표에게 그들은 결국 비법을 털어놨다.

요즘 솔티마을엔 맥주 양조장을 준비하는 업계 후배들의 발걸음이 잦다. 홍 대표는 바닥부터 쌓아올린 노하우를 흔쾌히 공유한다. 대신 배움은 직접 보고 질문하고 터득하는 사람의 몫이다. 본인도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솔티맥주는 정통 벨기에식 에일 맥주를 지향한다. 발효를 두 번 하는 벨기에 맥주는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발효·숙성을 거쳐 맥주가 만들어지기까지 보통 보름이 걸리는데, 솔티맥주는 40~50일이 소요된다. 솔티맥주는 지난 3월 벨기에 국왕 방한 때 청와대 공식 만찬에 초대받으며 진가를 인정받았다. 당시 만찬상엔 솔티8과 ‘오리지날 브라운’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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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도 당선 전 솔티맥주를 맛본 적이 있다. 솔티맥주는 올해 3월 벨기에 국왕 방한 때 청와대 만찬에 초대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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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은 벨기에식이지만 홍 대표가 진짜 만들려는 건 우리 농산물로 만든 ‘한국맥주’다. 최근 국내에도 수제맥주가 인기를 끌면서 실력 있는 양조장이 늘고 있지만 대부분 주재료인 홉과 맥아, 효모를 수입해 쓰고 있다. 맥주 맛을 특징 짓는 홉과 맥아만큼은 국산화해야 한국맥주라 할 수 있다는 게 홍 대표의 생각이다.

현재 솔티마을 7개 농가가 약 3만㎡의 밭에서 홉을 재배해 솔티맥주에 공급하고 있다. 고추농사를 짓던 마을 어르신들을 3년 동안 꾸준히 설득한 결과다. 홍 대표는 양조장을 시작한 2016년부터 13종의 홉을 재배하며 실험을 거듭해 생산량이 가장 좋은 6종을 추렸다. 6종의 홉을 수확하는 올해 가을이면 현재 10% 수준인 홉 자체 조달량을 크게 늘릴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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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티맥주는 솔티마을 농가에서 재배한 홉을 사용해 만든다. 덩굴식물인 홉은 4월쯤 심어 8월말에서 9월에 수확한다. 10여m가 넘게 줄을 타고 오르는 식물의 꽃이 바로 맥주 원료인 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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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티맥주는 국산 맥주보리를 가공한 유기농 맥아를 사용하는 것도 검토 중이다. 재료를 국산화하면 원가를 절감할 수 있어 수제맥주 진입장벽인 높은 가격도 낮출 수 있다.

홍 대표는 알코올 도수 9·13·17도의 벨기에식 수도원 맥주를 다음달 출시할 예정이다. 각각 도수가 비슷한 소맥·와인·소주와 경쟁시킬 술이다. 이름은 제천의 천주교 명소 배론성지를 따서 ‘배론맥주’로 지었다. 매출 일부는 배론성지 내 장애인 거주시설인 ‘살레시오의 집’에 후원할 계획이다.

현재 시판 중인 솔티맥주는 ‘솔티의 봄’(세종) ‘위트 에일’ ‘오리지날 블론드’ ‘벨지안 페일 에일’ ‘IPA’ 등 총 7종이다. 500㎖와 750㎖ 사이즈의 병맥주만 판다. 가격은 500㎖ 기준 8000~1만8000원. 수제맥주에 불리한 주세 때문에 소매점 판매는 하지 않는다.

서울에선 LP바 딱정벌레·레드제플린 등 20여개 일반음식점에서 맛볼 수 있다. ‘맥덕’들에게 유명한 이태원 우리슈퍼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 제천으로 직접 찾아가는 것도 방법이다. 미리 전화(043-646-2337)로 예약하면 1만5000원에 양조장 견학 후 마음껏 맥주를 마셔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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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크크릭 브루어리 작업실에 전 세계 맥주를 망라한 책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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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크크릭 브루어리는 지역명 제천을 뜻한다. 제천시 봉양읍에 위치한 솔티맥주 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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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술을 빚는 양조장이 2000곳이 넘는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전통주인 막걸리와 청주·소주, 그리고 와인에 맥주까지 우리땅에서 난 신선한 재료로 특색 있는 술을 만드는 양조장들이 점차 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이 전국 방방곡곡 흩어져 있는 매력적인 양조장들을 직접 찾아가 소개하는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맛좋은 술은 물론 그 술을 만들며 고군분투한 사람들, 술과 어울리는 해당 지역의 음식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전할 예정입니다. 맛난 술을 나누기 위한 제보와 조언도 언제나 환영합니다.


글·사진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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