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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허연의 책과 지성] 린위탕 (1895~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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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2012년 중국 작가 중 최초로 모옌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2000년 가오싱젠이 받은 적이 있었지만 그는 망명해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했기 때문에 프랑스 작가로 분류됐다.

모옌이 노벨상을 받기 전 후보에 가장 많이 올랐던 중국 작가는 린위탕이었다. 베이징을 무대로 청나라 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가족 3대의 흥망성쇠를 다룬 소설 '경화연운(京華煙雲)'은 중국뿐 아니라 영어권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세월이 한참 흐른 2000년대 들어서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중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드라마가 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인기있는 '중드'로 자리 잡았다.

린위탕은 사실 소설보다는 뛰어난 문명비평과 에세이로 더 유명하다. 1939년 친분이 있던 펄 벅에게서 "서양에 중국을 알릴 수 있는 소설을 써 보라"는 제안을 받고 '경화연운'을 쓰기 전까지 린위탕은 이미 논객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고 있었다.

그의 에세이 '생활의 발견'은 대단한 베스트셀러였다. 1960~1970년대 한국에서도 출간되어 한 집 건너 한 권씩 꽂혀 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저작권 개념도 없을 때였으니 마구 찍어낸 번역본 수십 종이 서점가에 나돌았다.

린위탕의 한자 이름을 우리식으로 읽으면 '임어당'이다. '아 이 사람!' 하고 무릎을 치는 나이 지긋한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당시 모든 책에는 저자명이 린위탕이 아닌 임어당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린위탕 에세이는 특히 서양과 동양을 비교하는 부분에서 맛깔스럽게 읽힌다. "뇌에 칼을 품고 태어난 서양인들은 너무나 날카로운 논리의 무기를 휘둘러 거의 모든 것을 잘라내고 온전한 진리를 훼손했다. 스스로 인간을 해부하며 인간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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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이었지만 중국을 미화하지만은 않는다.

"서구인은 아이들 심리를 알고 훈육을 하지만 중국은 곤봉으로 효자를 만든다. 서구인은 시간을 준수하나 중국인들은 산만하다."

1895년 중국 푸젠(福建)성 룽시(龍溪)에서 기독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린위탕은 일찍부터 서구 문물을 접한다. 상하이의 기독교계 대학인 세인트존스대학을 마친 그는 유학길에 올라 하버드대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한다. 디시 독일로 건너가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비교언어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귀국 후 베이징대와 칭화대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 1936년 미국으로 건너가 문필 활동을 계속한다.

그는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다양한 국가 경험, 기독교를 통해 몸에 밴 서구식 사고를 바탕으로 중국과 서양의 가교 역할을 한다.

물론 린위탕의 동서양 비교 자체가 결과적으로 '이분법'이라는 한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가벼운 듯하면서 위트넘치는 그의 글을 읽고 '재담가'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을 붙이는 사람도 있다. 아마도 "미국식 난방이 된 영국 별장에서 일본인 부인과 프랑스 애인, 그리고 중국인 요리사와 함께 살고 싶다"는 식의 문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판이 쏟아질 때마다 그는 말했다.

"한 발은 중국에, 한 발은 서방에 디디고, 한마음으로 우주의 문장을 평한다(兩脚踏中西文化 一心評宇宙文章)."

일일이 다 거론할 수는 없지만 그가 남긴 수많은 글들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세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린위탕은 사람들이 넘을 수 없는 장벽이라고 믿으며 살았던 국경을 일찌감치 뛰어넘은 명문장가였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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