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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불안한 인간이 멸종을 면한 건…선하고도 악해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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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진이, 지니'로 돌아온 베스트셀러 작가 정유정

매일경제

정유정 소설가는 소설을 출간한 뒤 석 달 동안만 외출한다. 이때 집중적으로 독자와 만난 후 작가로서 다시 `칩거`에 들어간다. 사진은 지난 22일 서울 서교동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만난 정유정 소설가. [이충우 기자]


변두리 마을 조무래기는 온통 남자뿐이었다. 혼자만 여자였다. 녀석들이 공을 차면 물주전자나 드는 신세였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저것들을 어떻게 휘어잡지….' 밥 굶던 시절에도 구경 좋아하는 할머니 손을 붙잡고 찾은 읍내에선 서커스단 연사가 '흥부와 놀부'를 재해석한 만담 중이었다. "낮엔 게으르고 밤에만 바빠, 애를 열씩이나 낳았다잖소!" 기막힌 해석에 소녀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동네로 돌아와 만담을 전해주니 인기스타가 됐다. 동화책을 작파하고 양념을 좀 쳐서 들려줬다. '이야기의 힘'을 믿던 소녀는 문학을 갈구했지만 모친 불허로 길이 막혔다. 간호사로 5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9년을 보내고 남편에게 선언했다. '자, 내 길을 가겠다.' 6년의 고투 끝에 화려하게 등단했고, 이제 그는 쓰는 소설마다 베스트셀러다. 장편 '진이, 지니'로 복귀한 정유정 소설가(51)를 만났다.

'진이, 지니'의 줄거리는 이렇다. 교통사고로 사육사 '진이'의 영혼이 영장류 보노보 '지니'의 몸에 들어간다. 한 육체에 갇힌 두 존재의 합일, 정신의 샴쌍둥이가 돼버린 진이는 삶의 무의미에 방황하던 '민주'에게 도움을 청한다. 세 존재는 사흘간 치열하게 얽혀 삶, 죽음, 생명의 본질과 대면한다. 거기에 인간(人間)이 서 있다. 곳곳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고찰한다. 더 공개하면 스포일러겠다.

일단 피 냄새를 맡으며, 벌어진 근육 틈으로 흰 뼈를 보여주던 이전 소설과 결부터 다르다. 단 한 명의 악인(惡人)도 등장하지 않는다. "보통의 인간만 나오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렇다고, 보통의 인간이 선하기만 한 건 아니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어른의 미성숙한 이야기다. 죽음 앞에 선 인간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저 주제에 집중하려 처음부터 악은 철저하게 배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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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공간으로 이해하면 삶과 동떨어진 처소에 놓인 실재가 되고, 시간으로 다가서면 삶에 이어지는 접점에 놓인 미지가 된다. 인간을 탐구한 그에게 죽음은 전자일까, 후자일까. "죽음은 그 자체로 '끝'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존재 자체가 '부재해지는' 사건이다. 인간은 죽음을 살며 깨닫지만 사실 인간은 죽음을 DNA처럼 안고 태어난다. 삶의 유한성이 인간을 불안케 한다. 죽음은 위험한 실체다."

펜을 쥔 그의 두 손은 양가적이다. 한 손은 핏물로 떡칠된 시체와 악수한 듯한 손이고, 다른 한 손은 시간을 딛고 성장하는 아이를 감싸는 손이다. "두 갈래의 소설은 극단의 길이 아니다. '7년의 밤' '28' '종의 기원'이 악의 삼부작이라면 그 이전엔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내 심장을 쏴라'를 썼다. '진이, 지니' 출간으로 자유의지 삼부작을 쓴 거다. 선악을 묶은 자리엔 결국 인간이 등장한다."

죽음과의 불화. 피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조건이 죽음이라면 삶은 무의미할까. 죽음만이 삶을 의미로 채우는 조건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죽음을 무의미하지 않게 만들려면 삶을 치열하게 사랑해야 한다. 최선을 다한 삶 끝에 죽음은 의미를 가진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엔 '나 자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거다. 죽음과 삶의 의미는 늘 관계를 맺는다. 소설과 주인공으로 나는 삶의 유의미성을 얘기하려 했다."

소설의 시간적 길이인 '사흘'은 그의 개인사와 무관치 않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정유정 소설가 어머니의 '마지막 사흘'에서 이번 소설의 사흘이 잉태됐다. 죽음을 바라보는 눈이 새로 자랐다. 어머니의 소천 이후에는 슬픔만 건재하다. "엄마의 죽음은 내 트라우마였다.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다만 조금 성숙할 뿐이다. 죽는 게 두렵다. 내가 나를 인식할 수 없다는, 나와의 작별은 언제나 두려운 문제다."

텍스트가 스크린으로 몸을 갈아입는 기분은 어떨까. 장동건·류승룡 배우가 열연한 영화 '7년의 밤' 얘기도 나눴다. "소설이 그대로 구현했느냐보단 처절한 미장센에 감동했다. 내 관심이 재해석된 부분도 창작자로서 기뻤다. 아내 죽음을 두고 장동건이 '미친년'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개봉 전 내가 본 장면과 실제 극장에서 상영된 장면이 달랐다. 슬퍼서 읊조리는 어조이길 바랐다.(웃음)"

본인의 글이 해외에서 호평받는 느낌도 물었다. 가본 적 없는 공간, 도달하지 못할 시간에 본인 작품이 읽히는 기분이랄까. "로버트 맥키는 '스토리(STORY)'에서 이야기를 '우리 삶에 대한 은유'로 정의했다. 소설가는 낯선 세계로 독자를 초대한다. 따라 걷다 보면 동일시하는 '나'를 발견한다. 삶의 은유를 발견하고 감정의 격랑을 겪어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룰 독자가 많아지길 바라는 건 욕심일까. (웃음)"

한번 몰입하면 정신의 질주가 시작된다. 이번 소설에 몰두하기 전 옆으로 미뤄둔 소설이 있다. "바다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준비하다 '시간의 어떤 순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문장을 읽었고, 멈춰섰다. 그래서 이번 소설에 집중했다." 다시 돌아갈지, 새로 구상할지는 그도 모른다. "늘 이야기는 유효기간이 있다. 한 번 깨진 접시는 접합이 어렵다. 쳐다보면 옛 남자친구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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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수집도, 플롯 구성도 모두 수기(手記)다. "손으로 써야 근육에 기억이 저장된다"는 정유정 소설가의 노트에는 문장이 빼곡했다. 맨 아래 노트엔 초고 플롯이 담겼고, 세 번의 변형을 거쳐 최종 플롯(맨 위쪽)이 완성됐다. 최종 플롯 노트의 표지엔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1668년작 `지리학자(The Geographer)`가 프린팅돼 있었다. 은행나무 출판사가 공개한 다섯 권의 플롯 노트 외에도 손가락 세 마디 굵기의 자료 노트 두 권 등 모두 10권이 넘는 상당한 분량의 노트가 종이박스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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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인터뷰에서 그는 자기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가 '인간'이라고 털어놨다. "나의 모든 소설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위해 쓰였다." 당시 답변을 그는 여전히 기억했다. "문학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이다. 이번엔 인간 본성을 영장류를 통해 조명했다. 하나의 소설로 복잡한 관계망의 인간을 규명하긴 어렵겠다. 여러 각도에서 비쳐보고 탐색하는 과정은 그 때문이다."

선악의 인간을 그린 그에게 선함과 악함을 물었다. "질투와 시기, 폭력성도 내 안에 있고 교육과 제도가 만들어낸 선량함도 숨겨져 있다. 악함보다는 '어두운' 단면이라고 본다면, 길들여진 선함이 나의 절반인 어두움을 억누르는 중이다. 착하다는 인간도 어두운 내면의 소유자다. 선하기만 하면 굶어 죽었고, 악하기만 하면 잡아먹었겠지. 우리가 멸종을 면한 건, 선하고도 악해서가 아닐까.(웃음)"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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