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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책 굽는 오븐]친애하는 인생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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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앨리스 먼로 지음·정연희 옮김

문학동네 | 400쪽 | 1만3500원

경향신문

오븐을 키워드 삼아 빵이나 케이크를 책과 연결시키는 서평 칼럼을 써보면 어떨까 처음 생각했을 때,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칼럼을 지속할 만큼 빵과 케이크의 종류가 그렇게 많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빵과 케이크가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큰 걱정을 하진 않았지만요. 칼럼을 쓸 때마다 특별한 순서 없이 책과 빵을 골랐지만 언젠가 쓰게 될 마지막 칼럼을 위해서 아껴놓은 빵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느 제과점에나 있는 흔하디흔한 빵. 지극히 평범한 외양을 지녔지만 속을 가만히 열어보면 가장 깊은 곳에 팥을 짓이겨 만든 까만 앙금을 품고 있는 그 빵. 바로 단팥빵이에요.

캐나다 소설가 앨리스 먼로의 소설들을 좋아하지만, 바람이 몹시 불어 쓸쓸한 어느 밤, 누군가와 갓 구운 단팥빵을 나눠 먹으며 단 한 권의 책을 함께 읽어야 한다면, 다시 읽고 싶은 것은 <디어 라이프>입니다. 이 단편소설집에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거나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은 등장하지 않아요. 하지만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우리는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그들이 저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내밀한 어둠을 가슴 깊은 곳에 품고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경향신문

소설가의 유년 시절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밤’이라는 작품에는 불면에 시달리는 ‘나’가 등장합니다. 어린 ‘나’는 잠결에 사랑하는 동생을 자기가 목을 졸라 죽여 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어요. 그러던 어느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배회하다 아버지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리고 불면의 이유를 묻는 아버지에게 동생을 다치게 할까봐 걱정된다는 말로 얼버무리려던 ‘나’는 진실을 털어놓고 싶은 욕망을 참지 못하고 고백하고 맙니다. “목을 조를까봐서요.”(368쪽) 저는 이 소설을 무척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소녀의 이야기를 다 들은 이후, 아버지가 들려준 대답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따금 다 그런 생각을 한단다.”(368쪽) 그리고 그 대답을 들은 ‘나’는 그제야 불면을 극복하고 다시 일상을 살아가게 되죠.

온기가 남은 오븐 곁에 둘러앉아 단팥빵을 나누어 먹는다 해도, 우리는 틀림없이 각자의 자리에서 고독할 거예요. 사람들은 누구나 타인에게 쉽게 발설할 수 없는 상처와 자기모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욕망을 감당하며 사는 존재들이니까요. 하지만, 한없이 고독한 존재들을 그리면서도 여든이 넘은 작가는 열 네 편의 소설들을 묶은 책에 ‘디어 라이프’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친애하는 인생에게. 친애하는, 이라니. 이토록 쓸쓸함으로 가득할 뿐인데도 인생을 바라보는 먼로의 눈길은 어쩌면 이렇게 다정한 걸까요? <디어 라이프>를 다시 읽으며 소설을 읽고 쓰는 일은 나의 내밀한 고백에 “사람들은 이따금 다 그런 생각을 한단다”라고 읊조려 주는 누군가를 만나는 행위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소설이 그런 것이라면, 당신과 내가 소설을 읽고 쓰는 사람들인 한 인생은 아직 친애할 만한 것일 수도 있겠다고요.

<시리즈 끝>

백수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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