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9 (수)

규제가 칸칸이 쪼갠 '공유 주방'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국은 '공유경제 갈라파고스'] 여러 식당 함께 쓰는 공유주방, 임차료 싸고 창업도 쉬운데…

'1식당 1주방' 법에 공간 쪼개 주방 각각 만들고 설비도 따로 사야

23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한 건물 1층의 '먼슬리 키친'. 83㎡(약 25평) 크기의 공간을 칸막이로 나눠 만든 8개의 공간에서 10여 명이 요리를 하고 있었다. 먼슬리 키친은 여러 식당이 한곳에 모여 냉장고와 싱크대 및 각종 조리 기구를 공유해 쓰는 '공유 주방'이다. 월 임차료 198만원만 내면 맨몸으로 들어와 배달 음식 사업을 할 수 있어, 요식업 분야 창업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있다.

하지만 '공유'는 말뿐이고, 실제로 함께 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8㎡ 공간에 냉장고와 싱크대, 조리 기구가 모두 따로 설치됐다. 에어컨과 가스관, 전선, 수도관까지 따로 들어갔다. "공유 주방이 아니라 쪽주방"이라는 말이 나온다.

'주방 하나에 식당 하나'라는 식품위생법 규정이 기형적 주방을 낳았다. 이재석 먼슬리키친 본부장은 "강남구청에 영업 허가를 받으러 갔더니 '주방 규제 때문에 안 된다'고 하더라"며 "올해 5월 2호점을 내며 부득이하게 공간을 8개로 쪼갰다"고 했다. 이 때문에 당초 최고급품으로 하려던 냉장고와 조리 기구는 대중적인 것으로 바꿨다. 그런데도 비용은 두 배가 들었다.



조선일보

‘2.5평 쪽주방’ 다닥다닥… 조리시설 공유 못하는 공유주방 - 지난 23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공유 주방 ‘먼슬리키친’에 입주한 요리사들이 벽으로 나뉜 2.5평짜리 ‘쪽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다. 공유 주방은 본래 하나의 큰 주방과 조리 시설을 여러 사업자가 나눠 쓰는 서비스지만 국내에선 규제 때문에 사업자 간 칸막이가 쳐지고 각각의 설비를 설치하고 있다. /김연정 객원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정부는 지난달 30일 창업 촉진과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발표한 '규제 샌드박스' 대상에 공유 주방을 포함했다. 업계는 "내용을 보면 어이가 없다"고 한다. 공유 주방을 서울 만남의 광장과 경기도 안성 휴게소 딱 두 곳에, 밤 8시 이후에만 허가했기 때문이다. 한 스타트업 대표는 "집에서 수십㎞ 떨어진 고속도로 휴게소 주방에 음식을 배달 주문하면 배달비만 엄청나게 나올 것"이라며 "기존 식당들의 반발이 두려워 말도 안 되는 방안을 규제 완화라며 뻔뻔하게 내놨다"고 했다.

공유 주방의 사례는 빙산의 일각이다. 한국은 차량 공유, 숙박 공유, 주방 공유 등이 뿌리조차 내리지 못한 '공유 경제의 불모지(不毛地)'가 된 지 오래다. 2015년 세계 최초의 '공유 버스'를 시작했던 콜버스는 택시·버스 업계의 극렬한 반대에 서비스를 접었다. 카풀을 추진했던 카카오모빌리티는 택시 업계의 반대에 부딪혀 사업을 포기했다. 승합차 공유·호출 서비스인 타다는 개인택시 기사들의 공적(公敵)으로 찍혀 위기를 맞고 있다.

최성진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대표는 "정부는 말로만 혁신 성장, 공유 경제를 육성한다고 하고 실제로는 공유 경제의 갈라파고스를 자초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타트업 에티켓은 학원과 집을 오가는 학원 셔틀 공유 서비스 '셔틀 타요'를 운영하고 있다. 전국 학원 중 80% 이상이 비용 문제로 인해 셔틀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에 착안해, 승합차 운전자들과 학원을 연결해 준다. 대중교통이 부족한 신도시 학부모에게 큰 인기를 끌며 1년 만에 300대 이상의 승합차를 운영할 정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 서비스도 정부 규제를 피해갈 수 없었다.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은 9인승 이상 자가용이 유상(有償) 운송을 하려면 13세 미만만 태워야 한다고 되어 있다. 손홍탁 에티켓 대표는 "초등학교 6학년은 타도 되고, 중학교 1학년은 못 탄다는 것은 무슨 기준인지 모르겠다"며 "국토교통부에 질의하니 '중학생부터는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면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현재 에티켓은 운영 차량을 80대로 줄이고, 직원 수도 대폭 감원했다. 손 대표는 "규제 때문에 더 이상 사업을 하기 힘들 것 같아 사업 모델을 바꿀 생각"이라고 말했다.

후기 남기지 말라는 숙박 공유

숙박 공유 서비스 에어비앤비도 한국에서는 일부만 합법이다. 외국인에게 방을 빌려주는 것은 괜찮지만, '농어촌민박업'으로 등록된 숙소를 빼고는 내국인에게 방을 빌려주면 안 된다. 이 때문에 국내 에어비앤비를 이용하는 집주인(호스트)들은 한국인 이용객에게 "후기를 남기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자칫 홈페이지에 한글로 된 후기가 올라갔다가 구청에 적발되기라도 하면 불법 영업으로 과태료를 내야 한다.

"비현실적 규제"라는 소비자의 비판이 줄을 잇자 정부는 지난 1월 '도시민박업'이라는 업종을 새로 만들고, 내국인들도 숙박 공유 서비스를 쓸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발표 이후 4개월 이상이 지났지만 법 개정 움직임은 없다. 한 숙박 공유 업체 관계자는 "정부가 청와대 압력 때문에 일단 (규제 완화) 발표는 했지만, 기존 숙박 업계의 극렬한 반발을 우려해 복지부동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차량 공유 사업을 둘러싼 갈등은 6년째 제자리다. 국토교통부와 국회가 지난 3월 '택시·카풀 사회적 대타협 기구'를 통해 "택시 업계와 스타트업계가 손잡고 규제 혁신형 플랫폼 택시 사업을 하겠다"는 합의안을 도출했지만, 이후 새로운 운송 서비스를 위한 법 개정 움직임은 전혀 없다. 결국 카카오모빌리티와 택시 4단체가 지난 23일 "빨리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정부와 정치권이 움직여 달라"고 촉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택시 업계는 승합차 공유 서비스인 '타다'가 개인택시 기사들의 생존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하면서 퇴출을 요구하고 나섰다.

공유 경제 익숙한 국민, 뒤처진 정부

반면 소비자는 공유 경제를 향해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 작년 11월 시작한 승합차 공유 서비스 타다는 6개월 만에 회원 수 50만명, 차량 1000대로 커졌다. 에어비앤비는 지난 3월 "국내 에어비앤비 이용자 290만명 중 202만명(69%)이 한국인"이라고 밝혔다. 국민은 이미 공유 경제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지만, 정부는 기존 산업의 생존권과 공유 경제를 통한 창업·일자리 창출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다. 국가가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외국 정부는 공유 경제 육성에 팔을 걷어붙였다. 미국은 공유 경제와 같은 신산업 육성에 '해를 끼치지 않는(do no harm)' 원칙을 적용한다. 새로운 시장·기술·산업이 등장하면 최소한의 규제만 적용하고, 충분히 성장했다고 판단되면 필요한 부분만 골라 사후 규제를 한다. 중국과 동남아도 같은 방식으로 디디추싱·그랩 같은 차량 공유 기업을 빠르게 성장시켰다. 심지어 '규제 천국'이라는 프랑스도 사업용 차량 면허(VTC)를 딴 사람만 우버 운전자로 등록할 수 있도록 해 우버와 택시 업계 간의 갈등을 정리했다.

한국 정부는 그러나 겉으로만 공유 경제를 활성화하겠다고 할 뿐, 현실에선 갓 창업한 기업까지 압박하고 규제로 얽매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택시·숙박 업계 등 기존 사업자가 반발하고 표심을 의식한 정치권이 이들의 손을 들어주기라도 하면, 정부가 공유 경제 기업 죽이기에 앞장서는 일도 다반사다.

김도윤 한양대 교수(경영학)는 "세계는 공유 경제로 질주하고 있다"면서 "정부의 역할은 공유 경제 기업을 육성하는 대책을 마련하는 것과 동시에 뒤처진 기존 산업계를 위해 별도의 보완책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유 경제(sharing economy)

기존 자원이나 유휴(遊休) 자원을 여럿이 쓰는 것을 골자로 하는 경제 체계. 2008년 로런스 레식 미국 하버드대 법대 교수가 저서 ‘리믹스’에서 처음 제시한 개념이다. 주차장에 세워져만 있는 자동차를 공유하는 우버, 집의 빈방을 여행객과 공유하는 에어비앤비 등이 대표적이다. 소유자는 어차피 쓰지 않는 자원을 활용해 수익을 낼 수 있고, 소비자는 비교적 싼값에 차·숙소 등을 쓸 수 있어서 효율적이다.




[강동철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