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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꿈에서 나는 종종 北의 고향을 목숨 걸고 다시 탈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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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형석의 100세 일기]

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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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사람은 저녁때가 되면 집 생각을 한다. 귀소본능이다. 새들은 둥지를 찾아가고 짐승들은 잠들 곳으로 간다. 외국에 가 머무는 사람은 계절이 바뀌면 고향을 생각한다. 나 같은 늙은이는 고향에 가 잠들기를 원한다. 내 모친도 북녘 땅 가까운 곳으로 가기를 바랐다.

나는 70여 년 전에 고향을 떠났다. 탈북할 때부터 반공 악질분자로 낙인찍혀 있어서 고향을 찾아볼 뜻은 포기하고 지냈다. 그런데 10여 년 전 두 차례 고향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내가 구호단체 월드비전의 명예이사로 있기 때문에 평양지부의 초청을 받았다. 비행기 좌석까지 배정돼 있었으나 갑자기 독감에 걸려 동행할 수 없게 되었다. 두 번째는 평양 과학기술대학 개교식에 VIP 중 한 사람으로 갈 기회가 생겼다. 제자인 김진경 총장이 청해 고려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평양의 정치적 사정으로 행사가 연기되면서 그것도 놓치게 되었다. 그 뒤로는 고향을 찾아보는 소원은 갖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꿈을 꾸곤 했다. 어찌어찌 북한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고향에 찾아가지는 못했다. 어떤 꿈에서는 겨우 뒷산까지 올라가 고향 마을을 내려다보면서도 간첩이나 불순분자로 몰려 처벌받을까 봐 들어가지 못했다. 가족과 친지는 고향에서 추방된 지 오래고 나를 반겨줄 사람도 없었다. 몇 사람이 남아 있기는 해도 공산주의자들이어서 나를 보안서에 고발할 것이다. 그런 때는 다시 목숨 걸고 탈출하는 공포심에 사로잡히곤 한다.

지난밤 꿈에는 다시 한번 마을 동쪽에 있는 초등학교 뒷산까지 찾아갔다. 소꿉친구 영길이가 보고 싶어서였다. 나보다 두 살 아래지만 20년 동안 같은 마을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함께 다닌 하나뿐인 친구이다. 동네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뒷산 길을 돌아 영길네 집 뒤 언덕까지 갔다. 평양에 살던 영길이가 고향집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대문은 잠겨 있고 집은 비어 있는 것 같았다. 막상 만난다고 해도 걱정이다. 공산당원이 된 영길이가 고발하면 나는 서울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때였다. 대문이 열리더니 영길이가 마당 쪽에 나타났다. 일곱 살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영길아!" 부르니 "너, 언제 왔어?"라면서 반겨 주었다. 같이 손을 잡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마을 서쪽 샛강 쪽으로 뛰어갔다. 옛날처럼 개구리 사냥도 하고 냇가에서 물고기도 잡았다. 논두렁길을 달리기도 했다.

어느덧 저녁때가 되었다. 영길네 집 뒤 언덕에 같이 앉았다. 길어 보이던 오후가 지나고 해가 서산에 걸려 있었다. 영길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얼굴이 60대의 어른으로 바뀌어 있었다. "형님, 나도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사는 평양 집도 고향은 아닙니다. 인민공화국 어디에나 사랑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고향은 사랑이 있는 곳이어야 하는데…."

꿈에서 깨어났다. 옆에 아무도 없었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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