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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노후 선박 현대화 지원금만 받고 이행 미뤄온 업체들… 해수부는 몇년간 뭐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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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9개 업체 중 6곳 약속 안지켜

노후 선박 현대화를 위해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는 '선박 현대화 사업' 관리가 부실한 것으로 드러났다. 업체들은 수년간 해양수산부의 눈을 속여 돈을 받아왔고, 해수부는 이를 발견하고도 가만있다가 최근에야 뒤늦게 수습에 나섰다. 그런데 그 과정과 대책이 매끄럽지 않다.

해수부는 이달 중순 선박업체 9곳에 '이차(利差) 보전사업 확약서 이행 여부 조사'를 실시했다. 이차 보전사업은 세월호 사태 후 정부가 노후 선박을 개선하고 안전을 강화하기 위해 실시한 '선박 현대화 사업' 중 하나다. 업체가 여객선이나 화물선을 신규 건조하거나 친환경 선박으로 개량하면 금융기관에서 빌린 대출 금리 일부를 정부가 지원하는 것이다. 2013년부터 정부는 400억원가량을 업체에 이자로 지원했다.

조선일보

A해운은 5년간 해수부와 약속을 지키지 않고도 정부 지원금을 타갔다. 해수부는 지난해 문제를 인지했지만 손을 놓고 있다가 최근에야 대책 마련에 나섰다. /해양수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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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업체들이 돈을 받고도 노후 선박 처리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A해운은 2014년 이차 보전사업 대상자로 선정됐다. 이들에겐 노후 선박을 해외에 매각하거나 폐선한다는 조건이 달렸다. A해운은 2014년부터 세금으로 이자를 지원받고 있지만 지금까지 해외 매각도 폐선도 하지 않고 있다.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9곳 중에 이런 식으로 정부를 속인 곳이 6곳이나 된다. 대출받은 지 5년 이상 지났음에도 '팔려고 했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노후 선박이 이렇게 버젓이 그대로 있다면 정부가 이자를 지원하면서까지 업체를 도울 이유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해수부는 왜 이런 업체들을 적발하지 않을까. 일각에선 해수부가 모든 업체의 이행 사항을 점검할 수 없다는 현실을 얘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런데 이 사안은 수사기관의 수사가 진행됐던 사안이다. A해운은 이차 보전사업 등을 통해 금융기관으로부터 돈을 빌리는 과정이 문제가 돼 사기와 해운법 위반 혐의 등으로 해경의 수사를 받았다. 검찰에 기소의견으로 송치도 됐다. 해경은 당시 A해운이 노후 선박을 해체하거나 해외 매각해 신규 건조 자금에 사용하기로 확약서를 제출하고도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문제라고 보고 해수부에 통보했다. 해경이 A업체가 문제가 된다고 해수부에 처음 통보한 것은 지난해 7월이었다. 해경 관계자는 "해수부도 권한이 있기 때문에 A업체에 대한 조처가 있을 것으로 보고 통보를 한 것"이라고 했다.

해수부는 10개월 가까이 이에 대해 반응하지 않다가 지난달 18일이 돼서야 A해운 대표를 불러 사실관계를 확인했다. 본지가 입수한 '해수부 조치계획' 자료에 따르면 해수부는 해경 통보에 따라 이 사실을 A해운 대표에게 확인했지만, '배는 팔려 했는데 매각 절차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답을 들었다. 해수부 측은 해경의 또 다른 수사 내용이었던 횡령, 해운법 위반 혐의에 다툼이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해 A업체에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당시 자료에는 '향후에도 이차 보전액 환수가 가능하다는 점 등을 고려해 법원 판결 결과를 지켜보고 행정 처분할 계획'이라는 내용만 담겼다.

본지가 관련 규정인 '연안선박 현대화 이차 보전사업 시행지침'을 살펴봤다. 이 지침 19조는 '해양수산부 장관은 사업자가 이차 보전사업과 관련해 지시 사항을 정당한 사유 없이 이행하지 않거나, 연안 선박 현대화 건조 자금 이외의 목적으로 사용할 경우 지급을 중단하거나 보전액을 환수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서정욱 법무법인 민주 변호사는 "해수부는 A해운이 시행 지침을 위반했는지 확인할 권한을 갖고 있다"며 "더욱이 시행 지침 위반은 과태료와 같은 행정벌에 해당하기 때문에 법원 판결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처리했어야 한다"고 했다.

A해운은 노후 선박을 해외 매각하거나 폐선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배의 예비선으로 등록하기까지 했다. 또 다른 예비선을 구입하면 자금이 들기 때문에 노후화돼서 폐선해야 할 배로 예비선 등록을 한 것이다. 노후 선박을 현대화한다는 이차 보전사업 취지를 완전히 거스른 행동이다.

사업자 선정에 탈락한 업체 입장에선 속이 터진다. 한 해운업계 관계자는 "확약서는 요식 행위로 제출하는 것이 일종의 관행처럼 돼 있었고 정부는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도 않았다"며 "탈락한 곳만 억울한 것"이라고 했다.

해수부 측은 '미흡했던 부분이 있었다'고 인정한다. 다만 "A해운의 경우 언제까지 확약 사항을 이행하겠다는 시기를 못 박지 않은 데다 여전히 대출을 받고 있어 처분을 내리기 애매한 측면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역시 찜찜한 설명이다. 해운업 전문 변호사는 "A해운이 노후선을 예비선으로 등록한 것으로 볼 때 이차 보전사업의 시행 취지 자체를 어긴 것으로 봐야 한다"며 "시기가 기재되지 않았다 해도 몇 년 이상 확약 사항을 지키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했다.

해수부가 뒤늦게 업체에 대한 조처를 강구하는 것 역시 본지 취재와 일부 업체들의 반발, 그리고 감찰 기관의 움직임 등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해수부는 A해운을 포함해 정부와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6곳에 확약 사항을 이행하라고 지시한 상태다. 해수부 관계자는 "약속대로 처분하지 않으면 조만간 강력한 조치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김아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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