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0 (월)

[터치! 코리아] "10차 방정식을 2차 방정식으로 풀려 한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최저임금 이어 52시간제 강행, 단순 해법 남발에 경제 '삐걱'

유연한 디지털 세상이 오는데 한국만 뻣뻣하게 거꾸로 간다

조선일보

김신영 경제부 차장


글로벌 암호 화폐 거래소 '바이낸스' 사장 창펑자오는 젊은 억만장자다. 그는 집무실이 없다. 노트북 컴퓨터만 켜면 어느 허름한 카페 한구석이라도 사무실이다. 지난주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에 온 그가 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다. "모두가 상시로 연결된 디지털 세상에서 근무시간 따져서 뭐 합니까. 부작용만 생깁니다. 출퇴근 시간 정해놓으면 딱 그만큼만 앉았다가 월급 챙겨가는 이가 많으니까요. 저는 직원이 하루 한 시간만 근무해도 상관없습니다. 할 일만 하면요." 이 회사 직원들은 세계 곳곳에서 자유롭게 일한다. 단, 성과가 미진하면 나가야 한다.

한국 A기업도 비슷한 블록체인 기술을 연구한다. 일하는 방식은 정반대다. 지난달 초부터 주 52시간 넘게 일하면 불법이기에 개발자도 '나인투식스'가 기본이다. 대부분 정직원이다. 소프트웨어 개발은 큰 프로젝트를 맡으면 몇 달 바짝 일했다가 또 몇 달 숨 돌리는 식으로 돌아가야 자연스럽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주 52시간'이란 기준선을 넘으면 대표가 처벌받는다는데. 관리자들은 근무시간이 길어 보이는 직원을 색출해 사무실에서 몰아내느라 바쁘다. 임원 B씨는 "저글링하는 심정이다. 내 창의성을 직원들 근무 관리에 쏟아붓고 있다"고 했다.

최저임금의 가파른 인상이 자영업·제조업을 뒤흔들더니 이제 '주 52시간 근무'란 파도가 몰려올 조짐이다. 강제 시행 두 달 만에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정부는 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최장 시간을 주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였다. 문재인 대통령 공약집에 따르면 취지는 일자리 나누기다. 사과 20개를 4명이 5개씩 땄다면, 5명이 4개씩 따자는 논리다. 일자리 늘리기, 참 쉽다.

하지만 파업 직전까지 갔던 버스 기사 반발이 보여주듯 이런 순진한 논리는 먹히지 않고 있다. 근무시간과 함께 급여도 줄어든다는 사실을 싫어하는 근로자가 많다. 또 일자리를 늘려야 할 경영자는 추가 인건비가 어디서 나오느냐고 비명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말했다. "52시간 근무는 신규 채용과 상극이다. 근무시간 챙겨줘야 하는 신입을 어디에 쓰나. 경력이 훨씬 낫다." 일자리가 늘어나기는커녕 줄어들 판이다.

엊그제 만난 한 경제학자는 "정부가 10차 방정식인 경제를 2차 방정식으로 풀려 하고 있다"고 했다. 경제는 복잡다단한 시스템이다. 수많은 이기적 주체가 저마다의 인센티브를 동력 삼아 움직인다. 이를 '근로시간 줄여 일자리를 나눈다' 같은 단순 논리로 조작하려니 답이 안 나온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국민소득을 늘리려면? 사장에게 직원 월급 올려주라 한다. 얼마? 시간당 (딱) 1만원. 실업자를 막으려면? 정규직을 강제해 해고를 막는다. 그래도 실업률이 높네? 정부 예산으로 아무 일이나 일단 막 시킨다. 이런 단순 처방이 끝 모르게 나온다.

MIT 경제학과 대런 애스모글루 교수는 책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경쟁과 인센티브를 억누르는 정치·경제 제도가 국가를 쇠락하게 한다고 설명한다. 방대한 과거 사례를 들어 집필한 이 책엔 '결정적 분기점'이란 단어가 90여 차례 쓰였다. 산업혁명 같은 역사의 중요한 기로에서 한 국가가 얼마나 포용적인(열리고 유연한) 제도를 갖췄는지에 따라 번영·실패가 갈린다고 그는 적었다. 인류 사회에 큰 변화를 불러온다는 디지털 혁명이 어지럽게 진행 중이다. 어쩌면 인류는 또 한 번 결정적 분기점에 섰는지 모른다. 미국부터 에스토니아까지, 세계 각국이 번영이란 물결에 올라타겠다고 몸을 풀고 있다. 한국 혼자 뻣뻣하고 단순한 '깁스 춤'으로 맞선다. 넘어질까 걱정이다.

[김신영 경제부 차장]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