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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일제와 만주국은 하나?…포스터에 드러난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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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비주얼 미디어로 보는 만주국'

연합뉴스

일만친선 포스터
[소명출판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두 군인이 각각 깃발을 든 채 손을 맞잡았다. 오른쪽 국기는 일장기인데, 노란색 바탕에 빨강·파랑·흰색·검정 가로줄을 작게 그은 왼쪽 국기는 낯설다. 20세기 초반에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진 만주국 깃발이다.

포스터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료하다. 일본과 만주국의 화합. 양국 군인은 함께 전장에 나아가 적과 싸운다.

동양사를 전공한 기시 도시히코(貴志俊彦) 일본 교토대 교수는 에서 포스터, 그림엽서, 우표 등 다양한 이미지를 통해 만주국의 허상을 낱낱이 파헤친다.

만주국은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으로 중국 동북부를 차지한 뒤 이듬해 3월 1일 세워 13년간 존속한 국가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푸이를 집정에 앉히고, 수도는 오늘날 지린성 창춘(長春)에 뒀다.

만주국이 지향한 중요한 가치는 일본·조선·만주·몽골·중국 다섯 민족이 화합을 이룬다는 '오족협화'(五族協和)였다. 만주국 치안부가 만든 '보갑사회 오족공영'(保甲社會五族共營) 포스터에는 다섯 명이 있는데, 왼쪽부터 종족 명칭인 한(漢)·만(滿)·일(日)·선(鮮)·몽(蒙)을 적었다.

이처럼 종족 간 조화를 강조했지만, 만주국 실상은 포스터와는 전혀 달랐다. 일단 민족 구성 면에서 종족 간 편차가 컸다.

저자는 "1938년 미야카와 겐조가 작성한 분포도를 보면 만주국에서 만한족(滿漢族)이 93%이고, 조선족은 2.7%, 몽골족은 2.6%, 일본족은 1.4%였다"면서 만주인과 한인(漢人)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은 이유에 주목했다.

그는 "만한족 가운데 만주인은 1% 미만이었을 것"이라며 "만주 주민 중에 한족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은 만주국 정통성을 흔들 수도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1930년대 초반 만주에 거주한, 국가 개념조차 희박했던 다양한 민족에게 국가와 국기를 정착시키는 일은 막대한 경비를 들여 행한 홍보정책만으로도 전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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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만안내소 포스터
[소명출판 제공]



만주를 향한 일본인들의 또 다른 시각은 미지에서 기원한 호기심이었다. 도쿄에서 찍은 선만안내소(鮮滿案內所) 포스터에는 젊은 여성 옆에 '개방되는 대륙, 선만(鮮滿)의 여행'이라는 문구가 있다.

저자는 만주국과 관련된 수많은 이미지가 추구한 목표를 "만주국 주민에게는 선전, 일본인에게는 만주국에 대한 인식 향상, 나아가 해외에는 만주국 승인이었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역사에서 알 수 있듯,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저자는 "지배 도식은 일본 정부 혹은 일본에 중심을 두었고, 이상으로 내세운 '오족공화'(五族共和)와는 거리가 멀었다"며 "홍보정책 담당자와 홍보 미디어 제작자, 게다가 모델까지도 대부분이 일본인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일본이 전시 총동원 체제로 기울어가면서 만주국에서 일본인을 제외한 98% 이상의 현지 주민은 피지배자로서만이 아니라 때로는 통치의 대상이라는 위치에서도 떨어져 나가 버렸다"며 "당시 일본인이 사용한 '만인'(滿人)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일본인 이미지 속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소명출판. 전경선 옮김. 308쪽. 2만1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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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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