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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백상논단] 수평적 연결 '리좀'과 연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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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연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

리좀은 탈중심화된 유연한 조직

연구생태계 수직 체계 바꿔야

더 넓은 과학지도 그릴 수 있어

서울경제


바쁜 한 주를 보내고 맞는 주말이면 집에서 편히 쉬는 것도 좋지만 조금씩 시간을 들여 베란다에 화단을 가꾸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조금씩 관심을 가지다 보니 어느새 주말이면 하게 되는 소소한 취미 활동이 됐다. 화단을 잘 가꾸다 보면 고추·방울토마토·포도 같은 결실들을 맛보는 수확의 기쁨도 누릴 수 있다. 취미로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40년을 연구자로 살다 보니 화단 가꾸는 일도 연구자의 관점으로 보게 될 때가 있다. 봄을 맞아 분갈이를 하면서 관찰하고 고찰해본 내용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화분에 심어놓은 군자란에서 네 그루가 새로 뻗어 나와 분갈이를 하게 됐다. 한 그루씩 나눠 심기 위해 전체를 화분에서 들어내니 처음 심은 군자란의 뿌리에서 잎이 뻗어 나와 새로운 한 그루가 된 것을 볼 수 있었다. 다섯 그루의 군자란이 하나의 뿌리로 연결돼 성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로 분리해 심을까 했지만 어디까지 뻗어 나갈지 관찰할 수 있도록 조금 더 큰 화분에 옮겨 심었다. 화단을 가꾸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지만 연구자의 관점에서 생명의 신비를 경험하고 관찰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과학자가 식물에서 생명 현상을 관찰했다면 철학자는 무엇을 관찰할까.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식물 뿌리가 수평으로 뻗어 나가며 새로운 줄기를 움틔우는 것처럼 서로 연결되고 성장하는 현상을 리좀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리좀은 줄기가 뿌리와 비슷하게 땅속으로 뻗어 나가는 땅속줄기를 지칭하는 식물학 용어이기도 하다. 줄기가 수직적으로 높이 솟아나는 수목형 식물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고구마를 생각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들뢰즈는 리좀의 원리를 여섯 가지로 설명한다. 어떤 다른 점과도 접속될 수 있으며 이로써 새로운 전체를 만드는 ‘연결’, 다양한 종류의 이질성이 결합해 새로운 이질성을 창출하는 ‘이질성’, 하나의 성질로 규정되지 않는 ‘다양성’, 기존의 연결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운 연결을 만드는 ‘비의미적 단절’, 그 모두가 합쳐진 ‘지도 그리기’와 이러한 현상이 반복되지만 동일하지 않게 변형돼 나타나는 ‘데칼코마니’다.

이질적인 것들이 연결돼 또 다른 이질성이 창출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리좀 현상의 핵심이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인 수목 모델은 중심화를 지향하는 위계화되고 경직된 조직인 반면 리좀은 탈중심화된 유연한 조직을 표상한다.

연구자의 관점, 철학자의 관점에 이어 연구기관 리더의 관점에서 리좀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리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연구생태계도 리좀 같은 모습으로 뻗어 나가야 하지 않을까.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연구실들이 성장하면서 설립된 부설 연구소들은 한국전자통신연구원·한국생명공학연구원으로 성장하는 모태가 됐고 분산돼 있던 연구기관들이 국가과학기술연구회로 모이면서 네트워크로 연결될 수 있었다. 기관이 설립되고 분화돼 성장하고 결합돼 연결되는 모습은 리좀과 닮아 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리좀보다 수목에 가까운 것이 현실이다. 기관마다 뿌리를 둔 학문 분야와 문화가 다르다 보니 기관 간 담장이 높고 수평적으로 연결되기가 어렵다. 기술 혁신을 위한 경계 없는 융합이 가속화하고 있는 시대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수직적이고 경직돼 있는 연구체계가 아닌 수평적이고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 리좀 형태의 연구생태계가 갖춰져야 더 넓은 과학지도를 그려나갈 수 있다.

미국 유타주에는 ‘판도’라는 사시나무 군락이 있다. 4만7,000여그루가 자라고 있어 숲처럼 보이지만 모든 뿌리가 연결돼 있는 하나의 나무다. 8만년을 산 것으로 추정되고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유기체로 알려져 있다. 이런 판도의 크기가 최근 들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주변을 개발하면서 늑대를 제거했고 그로 인해 급증한 사슴들이 나무의 새순을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생태계가 건강하지 못하면 8만년을 살아온 유기체도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우리 연구기관들도 더 멀리 더 넓게 뻗어 나가기 위해서는 다양성을 갖추고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건강하고 유연한 연구문화와 생태계를 잘 가꿔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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