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17 (월)

'퀴퍼 산증인' 한채윤 서울퀴어문화축제 기획단장…"광장에서 혐오 면역력 키워요"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16일 오후 한채윤 서울퀴어문화축제 기획단장이 제20회 서울퀴어문축제가 열리는 서울광장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 단장은 제20회 행사 전야제인 ‘핑크닷’ 티셔츠를 입고 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16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경향신문과 만난 한채윤 서울퀴어문화축제 기획단장은 오는 6월1일 열리는 ‘제20회 서울퀴어문화축제’의 역사가 ‘비’ 때문에 시작됐다고 했다. 지금은 수만명이 넘는 참가자들이 퀴어문화축제의 절정인 거리행진에 나서지만, 2000년 처음 열린 서울퀴어문화축제는 50여명의 참가자들이 다른 단체 행사에 끼어 행진할 계획이었다.

20년 전 열린 첫 서울퀴어문화축제는 대학 강당을 빌려 진행하는 성소수자들의 문화 행사로 기획됐다. 미국과 유럽에서 이미 자리잡은 ‘프라이드 퍼레이드’에선 거리행진이 핵심이지만, 당시 한국 상황에선 성소수자들이 거리를 행진하는 행사를 열기 힘들었다. 거리행진을 하려면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1회 퀴어문화축제인 ‘무지개 2000’은 처음엔 거리행진이 계획에 없었다. 매년 이어질 행사라고 생각하지 못해 ‘제1회’라는 명칭도 붙이지 않았다. 무지개2000이 대학 강당을 빌려 각종 문화 축제를 열기로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차없는거리로 지정된 서울 종로구 혜화동 대학로 거리에서 행진을 계획하고 있던 한 단체가 거리행진에 함께 하자고 제안하면서 성소수자들의 첫 ‘퍼레이드’가 준비됐다. 한 단장은 “역사가 참 재밌다. 여러 단체 중 한 팀으로 거리행진에 참여하기로 한 건데, 그날 마침 비가 왔고 다른 팀은 하나도 오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단독행진이 됐다”고 말했다.

빗속에서 진행된 성소수자들의 역사적인 첫 거리행진에는 50명 정도의 참가자들이 나섰다. 나름대로 준비한 피켓을 들고 차 한대를 앞 세웠다. 처음엔 정해진 코스를 한 바퀴만 돌기로 했는데, 다들 기분이 좋아서 한 번 더 돌았다.

무지개2000에선 단순 참가자였던 한 단장이 19년째 서울퀴어문화축제의 기획·총괄을 맡게 된 건 호주에서의 경험 때문이다. 호주의 ‘마디그라 퍼레이드’를 방문했을 때 느낀 해방감에 압도됐다고 했다. 한 단장은 “차도 위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걷는 행위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해방감을 느꼈다”며 “이 벅차오름과 환희를 성소수자와 더 많은 사람이 함께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한 단장은 귀국한 뒤에 ‘‘제2회’라는 이름을 붙여 퀴어문화축제를 기획했다. 그리고 이어진 20년 동안 퀴어문화축제는 성소수자들이 매년 손꼽아 기다리는 행사가 됐다. 2명의 상근 직원과 봉사자들이 준비하는 퀴어문화축제는 지난해 행사 참가자가 10만명을 훌쩍 넘은 것으로 집계됐다. 처음엔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부에서도 ‘조용히 살아도 되는데 꼭 나서야 하느냐’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참가자들이 늘어나면서 ‘스스로의 존재를 긍정하는 행사’로 자리잡았다.

행사 규모가 커지면서 혐오세력의 활동도 활발해졌다. 2013년 서울 마포구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부근에서 열린 행사에 참가 인원이 5000명을 훌쩍 넘겨 성공하면서부터 혐오세력이 등장했다. 이들은 마포구청에 항의 전화를 하는 등 존재를 드러냈고, 이듬해 신촌에서는 아예 행사장 주변에 집회신고를 내 행사 준비를 방해하고 거리행진을 가로막았다. 2015년에는 대학로에서 열릴 예정이던 행사를 아예 못하게 하려고 경찰서에 텐트를 치고 미리 집회신고를 하기 위해 기다리기도 했다. 결국 행사 장소를 서울광장으로 바꾸고, 관할인 남대문경찰서가 아니라 서울지방경찰청에 가서 집회 신고를 하는 ‘작전’까지 써 겨우 행사를 열었다.

혐오세력의 등장은 성소수자자들의 살아가는 현실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평생 단 한 번 듣기 힘든 혐오 발언을 성소수자들은 퀴어문화축제에서 적나라하게 들었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을 만나면서 성소수자들은 차별과 억압이 존재해 왔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느꼈다. 한 단장은 “혐오세력이 등장하면서 ‘일년에 단 하루 하는 행사도 왜 이렇게 반대하지’라는 의문이 생겼다. 길을 가다가 ‘너 동성애자니 걷지 마’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고 했다. 숨어서 잘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일을 부정적으로 보던 이들도 퀴어문화축제에 합류한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상처 받을 것을 알면서도 많은 성소수자들은 퀴어문화축제 행사장으로 나와 서로를 향해 ‘괜찮다’고 응원했다. 한 단장은 “행사장에 들어오기까지 많은 혐오 발언을 듣고 상처를 받는다. 그렇게 행사장에 들어오면 다시 서로 응원하며 안락한 기분을 느낀다. ‘이겨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혐오에 대한 면역력도 기른다”며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 혼자가 아니다’ ‘우리 주변에 성소수자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안다. 퀴어문화축제가 이런 힘을 주는 행사가 됐다는 게 큰 의미가 있다”고 했다.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 이성애자들도 늘어났다. 한 단장은 “이성애자 참가자의 후기 중 ‘남자 게이들이 나를 쳐다볼까 두려웠는데,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었다. 다들 평범한 사람이더라. 무참히 깨진 건 나의 선입견이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며 웃었다. 또 “기관 모니터링 결과 중 ‘서울퀴어퍼레이드에 가보니 축제의 원형을 간직한 곳이더라’는 평가도 있었다. 지역 축제 등에 가보면 특산품 판매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퀴어문화축제는 축제를 통해 인간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좋은 현장이라는 평가였다”고 말했다.

노출과 음란성에 대한 비판은 퀴어문화축제를 향한 혐오세력의 주된 반대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한 단장은 “물총축제, 머드축제 등 다른 여름 행사에서도 노출 정도가 더 심한데 퀴어문화축제를 비판하던 분들은 이런 행사는 지적하지 않는다”며 “반대를 하려면 문제만 보이고, 음란하게 보려면 어떻게 옷을 입고 행동을 해도 음란해 보이는 법이다. 동성애자가 벗은 게 더 음란하다고 여긴다 게 더 편견이다. 그 편견을 없애기 위해 우리가 옷을 더 갖춰입어야 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퀴어문화축제가 다양한 소수자들이 함께 연대하는 장이 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한 단장은 말했다. 그는 “과거에만 해도 장애인·노동자 등 다양한 인권 문제의 영역에서 ‘우리 중에는 동성애자가 없어’라고 말하는 분위기가 있었다”며 “하지만 최근 다양한 영역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관점이 달라지고 있다. 퀴어문화축제가 성소수자들이 서로 지지하고 기운을 얻는 행사를 넘어 여러 소수자들이 섞이는 장이 되어가는 것도 성소수자들이 여러 영역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기대와 평가가 달라지고 있는데, 올해도 이 부분을 많이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올해 퀴어문화축제 전날인 31일 밤에는 처음으로 ‘핑크닷’(Pink dot) 행사가 열린다. 핑크닷은 분홍색 티셔츠를 입고 형광등을 비춰 거대한 분홍색 원을 만든 행사다. 성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는 의미를 담은 거대한 분홍색 원을 만드는 행사다. 만들어진 원의 크기가 성소수자 인권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열려 있는지를 나타낸다.

한 단장은 “지난 20년의 역사를 하나로 묶는다면 결국 평등을 향한 도전이었다. 앞으로 그 도전이 계속될 것이라는 의미로 올해 표어는 ‘스무 번째 도약, 평등을 향한 도전’이라고 했다”며 “2000년부터 성소수자들이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고 소통하고자 노력해왔는지, 기억해주고 관심을 갖고 평가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16일 오후 한채윤 서울퀴어문화축제 기획단장이 제20회 서울퀴어문축제가 열리는 서울광장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 단장은 제20회 행사 전야제인 ‘핑크닷’ 티셔츠를 입고 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전현진·조문희 기자 jjin23@kyunghyang.com

최신 뉴스두고 두고 읽는 뉴스인기 무료만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