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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발자취] 중화학공업화 설계한 박정희의 '경제 브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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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철 前 청와대 경제수석 별세… 한국경제 기틀 마련한 전문 관료

朴대통령 "그는 國寶야" 찬사… 중동 진출, 방위산업에도 앞장서

1965년 초, 상공부 화학공업 1국장 오원철은 대통령 연두순시에서 이렇게 보고했다. "북한에서는 비료, 비날론 섬유 등 모든 화학 및 섬유제품을 석탄을 원료로 해서 생산하고 있습니다. 전기를 많이 쓰고 생산비가 많이 들어서 다른 나라에서는 이미 폐기한 공법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석유화학공업이 완성되면 경공업 분야에서는 남한이 단연 우위에 설 수 있습니다."

이 말에 설득당한 박정희 대통령은 즉석에서 '석유화학공업기획단'을 구성해 준비 작업을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가발이나 섬유 같은 경공업으로 근근이 먹고 살던 대한민국 땅에 중화학공업이 태동한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972년 국내 최초 울산석유화학단지가 준공하면서 본격적인 '한강의 기적'이 시작됐다.

박정희 정권 시절 경제 개발을 이끌며 박 대통령으로부터 '국보(國寶)'로 불렸던 오원철 전(前) 청와대 경제수석이 30일 오전 7시 91세로 별세했다. 그는 1971년부터 1979년까지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대통령을 보좌하며 한국 경제의 기틀을 만든 '박정희의 경제 브레인'이었다. 김형아 호주국립대 교수는 2005년 펴낸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 책에서 고인(故人)을 "박정희, 김정렴(비서실장)과 함께 '삼두정치'를 통해 중화학공업을 추진한 테크노크라트(전문 관료)"라고 표현했다.

조선일보

오원철(왼쪽 사진 오른쪽)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1970년대 부산한독기계공고를 순시하던 박정희(왼쪽에서 둘째) 대통령을 수행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중화학공업화에 필요한 산업 역군을 키우기 위해 우수 공고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오른쪽 사진은 2013년 본지와 인터뷰하는 오 전 수석. /동서문화사·채승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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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오일 쇼크' 당시 중동에 진출해 달러를 벌어들인다는 묘안도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이 터지고 유가가 치솟자 막 중화학공업의 걸음마를 뗀 대한민국은 치명상을 입었다. 경상수지 적자가 급증하고 물가가 치솟았다. 공군 소령 출신의 오 수석은 1974년 1월 박 대통령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중동은 작업 환경이 나쁜 곳이어서 선진국 기술자는 돈을 아무리 줘도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군인 정신으로 무장한 제대 장병이 수십만 명이나 있습니다. 중동에서 또 중요한 게 공기(工期) 단축인데, 우리나라가 선진국보다 기술력은 낮아도 여기에 강점이 있습니다." 대통령의 재가가 떨어진 이후 삼환기업, 현대건설, 동아건설 등이 차례로 중동에 진출했다. 그러자 한 번도 구경도 못 한 규모의 달러가 국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고인은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은 표리일체(表裏一體)"라고 대통령을 설득해 방위산업을 육성하는 데도 앞장섰다. "무기는 외국산을 써야 한다"고 저항하는 군인들에게는 "외국산 구매에만 매달리지 말고 국내 방위산업을 키워야 한다"고 호통을 쳤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흘러 오늘날 한국은 전투기를 수출하는 나라가 됐다.

고인은 황해도 출신으로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공군에서 제대한 후 최초 국산 자동차인 시발자동차에서 공장장으로 일했다. 그러다 1961년 5·16 직후 기술 인재를 찾던 박 전 대통령에 의해 국가재건기획위원회 조사과장으로 발탁되며 공직에 입문했다. 명석한 두뇌에 배짱과 추진력을 갖춘 고인을 박 대통령은 전적으로 신뢰하고 총애했다. 창원 공업단지 시찰을 마치고 만족한 박 대통령이 간담회를 하며 기자들 앞에서 "오원철이는 국보야, 오 국보!"라고 칭한 일화는 유명하다. 박 대통령의 마지막 숙원 사업이던 행정수도건설 사업도 고인이 기획단장을 맡아 추진했다.

박 대통령 서거 후 신군부가 들어서자 고인은 '구악'으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 1980년 권력형 축재 혐의로 체포돼 공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12년간 대외 활동을 못 하고 자택에서 칩거 생활을 했다. 이후 그는 박 대통령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를 선진국 입구까지 끌어올린 자신의 경험을 후대에 남기는 일에 매진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형 경제건설'이라는 7권 분량의 대작을 썼고, 2006년에는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 강국 만들었나'라는 제목의 672페이지 책을 냈다. 2009년엔 박 전 대통령 서거 30주년을 맞아 영문 자서전 '더 코리아 스토리'를 출간하기도 했다.

박정희 시대를 향한 비판에 그는 평생을 조국 근대화에 몸바쳤다는 자부심으로 맞섰다. 유신에 대해서는 "경제 대국 건설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했고, 5·16에 대해서는 "한국식 산업혁명의 출발이자, 10여 년 만에 민생고를 해결해 '혁명공약'을 완수했다"고 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오범규 명지대 교수와 딸 오인경 전 포스코 상무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발인 6월 1일 오전 7시 30분. (02)2258-5940





[최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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