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기차여행은 배낭 멘 20대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다. 체력도 패기도 예전 같지 않은 30대로 접어든 후엔 유럽 기차여행의 기회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틀렸다. 캐리어 끌고 떠나는 30대 이후의 유럽 기차 여행도 충분히 좋다. 아니 솔직히, 훨씬 더 좋다. 아, 그게 일등석이라면 더욱더.
뿌연 안개 속으로 가로등 불빛이 번지는 런던의 새벽. '해리 포터'에 나오는 바로 그 기차역, 런던 킹스크로스역에 도착했다. 유니버설스튜디오에 가짜(?)로 만들어 놓은 킹스크로스역만 봐도 설?는데 진짜에 와 보다니, 심지어 여기서 실제로 기차를 탄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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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는 마음도 잠시, 허기가 진다. 기차 타고 가는 길에 배고프면 서러울 테니 아침은 먹고 타야지. 킹스크로스역 안에서 맛집의 오라를 뿜는 카페에 들어가 그 유명한 '잉글리시 브렉퍼스트(English Breakfast)'를 주문했다. 두툼한 베이컨과 육즙 가득한 소시지, 달걀프라이, 베이크드빈, 아보카도, 버섯구이까지 든든하게 먹고 기차에 탑승. 이번에 탄 기차는 런던 노스 이스턴 레일웨이(London North Eastern Railway), 줄여서 LNER라 부른다. 유레일패스가 있으면 LNER 일등석 좌석을 7유로만 추가 지불하고 사전 예약할 수 있다.
처음 타본 영국 기차 일등석은 기대 이상이었다. 일단 좌석이 한국의 우등고속버스처럼 널찍해 마음에 들었고, 탄탄한 가죽 의자 등받이에 '퍼스트 클래스(First Class)'라고 큼직하게 적혀 있는 것도 심리적인 만족감을 줬다. 비행기 일등석 탈 돈은 없어도, 기차 일등석은 이렇게 타볼 수 있구나 싶어서. 화장실도 깨끗하고 와이파이도 팡팡 잘 터지고, 창밖으론 짙은 안개가 깔린 영국의 교외 풍경이 지나갔다. 그 풍경 속에서 이따금 말들이 풀을 뜯고 있었고, 처음 보는 나무와 아기자기한 나무 집들도 지나갔다. 좋다, 좋다.
그런데 진짜 좋은 건 이제부터다. 테이블마다 메뉴판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구경이나 해보자 하고 펼쳐보니 식사 메뉴는 물론 와인·맥주·위스키 등 드링크 메뉴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가격표가 없다. 이거 설마 무료, 그러니까 기차 요금에 다 포함된 건가? 확신이 없어 눈치만 살피고 있을 때 승무원들이 커다란 카트를 돌돌돌 끌고 들어왔다. 영화에서나 봤던 정통 영국식 영어로 (심지어 너무나 친절하게) 어떤 음료를 마시겠느냐고 묻는다. 커피, 과일주스, 홍차, 탄산음료 등 종류도 다양. 원하는 음료를 한 잔씩 주더니 아침식사는 뭘로 할지 정했느냐고 물어온다. 그렇다. 영국 LNER 기차 요금엔 식사와 음료, 심지어 술까지 다 포함돼 있다. 끝내준다.
영국은 섬나라다. 자동차로는 다른 유럽 국가로 넘어갈 수가 없다. 그러나 기차를 타면 가능하다. 해저터널로 영국과 유럽 대륙을 잇는 고속열차 '유로스타(Eurostar)'가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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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유럽에서 기차여행을 하면 특별한 절차 없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지만 유로스타는 좀 다르다. 국제선 비행기를 탈 때처럼 출발 두 시간 전 도착해 체크인, 보안검색, 출국심사를 해야 한다. 브렉시트가 실제로 시행되면 어찌 변할지 모르겠지만 출국심사는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 대합실에는 향수와 마그넷, 해리 포터 기념품 등을 파는 작은 면세점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가장 흥미로운 건 여권 도장에 비행기가 아닌 기차 그림이 찍혀 나온다는 사실! 덕분에 여권에 귀여운 도장을 하나 더 얻었다.
유로스타에는 3가지 클래스의 좌석이 있다. 좋은 좌석 순으로 비즈니스 프리미어, 스탠더드 프리미어, 스탠더드. 이번에 탑승한 좌석은 스탠더드 프리미어다. 유로스타를 타는 경험은 흥미로운 점투성이었다. 일단 기차 내부가 정말 깨끗했고, 해저터널을 지나는데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싶을 정도로 와이파이 속도가 빨랐다. 승무원들은 몹시 상냥하고 친절했다. 유럽 비행기나 기차에서 이 정도 친절을 경험한 적이 없었기에 조금은 얼떨떨했다. 맛있는 프랑스 와인과 치즈가 포함된 식사도 훌륭했다. 물론 와인은 더 달라고 할 때마다 더 줬다. 이 모든 서비스는 기차 요금에 포함되어 있어서 추가로 돈을 지불할 일이 없다.
영국 런던에서 출발한 기차는 프랑스를 지나, 벨기에를 거쳐, 목적지인 네덜란드 로테르담까지 약 3시간30분이 걸렸다. 기차가 벨기에 브뤼셀을 지나던 시각, 하늘이 연한 파스텔톤으로 물들며 노을 지고 있었다. 정말이지, 내리기 싫은 기차다.
▶▶ 유럽 기차여행 100% 즐기는 TIP
이번 여행은 유럽 31개국 기차를 자유롭게 탈 수 있는 열차패스인 '유레일 글로벌패스'로 하는 여행이었다. 작년까지는 유레일패스가 있어도 영국 기차는 탈 수 없었지만, 올해부터 영국이 유레일패스 이용 가능 국가에 포함됐다. 유레일 글로벌패스는 종류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인데, 성인·일등석 기준으로 가장 저렴한 건 1개월 안에 3일을 선택해서 사용할 수 있는 패스로 290유로부터.
유레일패스가 있으면 영국 런던 킹스크로스역~요크 구간 LNER 열차 1등석을 사전 좌석예약 비용 7유로만 내고 탈 수 있다. 이 구간 열차의 정상 요금은 약 150유로. 한 번만 왕복해도 본전을 뽑는 셈이다.
일등석 유레일패스가 있으면 유로스타 요금도 할인받을 수 있다. 영국 런던에서 네덜란드 로테르담까지 가는 스탠더드 프리미어 좌석은 43유로부터 예약 가능하다. 유로스타는 일찍 예약할수록 저렴하고, 특히 주말이나 성수기 좌석은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매진될 확률이 높다. 출발일 기준 6개월 전부터 유레일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레일플래너'에서 예약할 수 있다.
※취재 협조=유레일
[영국 = 고서령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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