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27 (목)

"갓 졸업한 박사는 어디서 경력쌓나" 강사 공개채용 의무화 '후폭풍'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중앙일보

지난 3월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강사 구조조정 저지와 학습권 보장 결의대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가 적힌 풍선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대학 시간강사 지위 향상을 위한 강사법이 8월부터 시행되는 가운데, 대학원 졸업 후 강사 자리를 찾으려는 신규 박사들에게 빨간 불이 켜졌다. 개정 강사법이 강사 공개채용을 의무화하면서 경력 없는 신규 박사들이 불리한 데다가 채용 후 3년간 재임용을 보장하는 규정 때문에 채용문이 더욱 좁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서울의 한 대학에서 인문계열 박사학위를 취득할 예정인 A씨는 최근 '박사 백수'가 될까 걱정하고 있다. 그는 “강사법으로 공개채용이 의무화되면 강의 경력이나 연구논문 실적으로 강사를 뽑을 텐데, 경력이 미미한 신규 박사는 기존 강사들과 경쟁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A씨는 “강사법이 강사들의 권리 향상에 도움이 되지만 갓 졸업한 박사들에게는 진입 장벽을 높인 것 같아 막막하다”고 했다.

이런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2학기 강사 공개채용 공고를 낸 고려대와 서강대 모두 연구논문 실적과 강의 경력 등을 요구했다. 두 대학 모두 경력이나 실적을 증빙하기 위한 자료와 강의계획 등의 서류를 요구했다. 다른 대학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공개채용을 진행할 계획이다. 서울의 한 대학 관계자는 “공정성 논란이 없어 지려면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한 경력과 실적 위주로 평가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서강대의 강사 공개 임용 공고에 나온 심사 항목. 연구업적과 교육경력 등을 요구하고 있다. [서강대 홈페이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교육부가 공개채용을 의무화한 이유는 공정성 때문이다. 그간 강사는 교수들이 추천하거나 자신의 제자에게 기회를 주는 식으로 채용돼왔다. 최은옥 교육부 고등교육정책관은 “그동안 교수가 알음알음으로 채용하던 문화가 공개 채용을 통해 변화해서 대학 사회가 투명해지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강의를 주로 하는 강사들에게 연구논문 실적 등을 강요하는 데에 강사 단체에서는 반대 목소리가 나온다. 강사 단체 '분노의 강사들'은 성명서를 통해 “전임교원을 뽑는 수준의 공개채용 기준에 벌써 시간강사들이 좌절을 맛보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높아진 채용 기준에 대해 “수영 잘해서 여기까지 오실 분들은 업그레이드된 구명조끼 마련했으니 헤엄쳐오라는 소리”라고 꼬집었다.

기존 강사보다 논문은 물론 강의 경력도 미미한 신규 박사들은 박탈감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수도권 사립대에서 시간강사를 하는 B씨는“아무 경력도 없던 때에 교수 추천을 통해 강의 자리를 잡을 수 있었는데, 시작부터 실적을 요구하면 신규 박사들은 어디에서 경력을 쌓느냐”고 말했다.

특히 강사들은 최소 1년 임용을 보장하고 3년까지 재임용 절차를 보장하는 강사법 규정이 신규 박사들에게 걸림돌이 된다고 보고 있다. B씨는 “이번 2학기에 채용이 된 강사는 3년간 걱정이 덜하겠지만, 탈락한 강사들은 3년간 강사 자리가 나오지 않아 더 힘들어질 것”이라며 “강사 간 양극화가 심해지는 셈”이라고 했다.

중앙일보

박백범 교육부 차관이 4일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강사법'(개정 고등교육법) 현장 안착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교육부는 신규 박사들의 강사 진입이 어려워지지 않도록 채용 시 신규 박사만을 대상으로 하는 '임용 할당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할당제는 법적으로 의무 사항이 아닌 데다가 교육부가 신규 박사 임용 비율도 정하지 않고 대학 자율에 맡겼다. 교육부는 “대학마다 상황이 달라 일률적으로 요구할 수 없다”고 밝혔다.

임용 할당제가 신규 박사들의 숨통을 틔워주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최근 임용 계획을 발표한 고려대는 강사가 담당할 1318개 강의 중 89개(7%)만 신규 박사 몫으로 할당했다. 서강대도 139개 강의 중 11개(8%)만 신규 박사 몫이다.

교육부는 향후 정부 재정지원사업(BK21) 선정 평가 시에 학문 후속세대의 고용 안정성을 반영하겠다고 밝혔지만, 대학들이 얼마나 따를지는 미지수다. 전국대학원생노조는 성명서를 통해 “박사학위 신규 취득자를 대상으로 하는 임용 할당제에 대학이 적극 협조하라”고 요구했다.

남윤서 기자 nam.yoonseo1@joongang.co.kr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