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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오래 전 '이날']6월10일 폭탄주가 부른 폭탄발언 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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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부터 2009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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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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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6월10일 폭탄주가 부른 폭탄발언의 진실

“술에 취해 기억나지 않습니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음주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 어떻게 봐야 할까요? 형법 제10조에는 술이 취한 상태로 저지른 일부 범죄에 대해 심신미약 상태로 보고 형을 줄여주는 ‘음주 감형’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술을 핑계로 죄질에 비해 너무 약한 처벌을 받는 사례들이 나오면서 음주 감형을 없애자는 여론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폭탄발언을 해놓고 폭탄주 탓을 했던 부장검사가 논란이 됐던 적이 있습니다. 당사자는 취중실언이라고 했고, 사람들은 취중진담이라고 믿었죠. 덕분에 새로 취임한 법무장관이 검찰 간부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면서 폭탄주 자제령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취임 일성으로 콕 꼬집어서 술 문제를 거론하다니 흔치는 않은 일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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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6월10일 경향신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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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오늘 사회면 기사에 따르면 당시 김정길 신임 법무장관은 검찰 간부들에게 “진형구 전 대검공안부장의 취중 발언이 나라 전체에 엄청난 파문을 빚고 있다”며 “검사들은 품위를 지켜야 하며 특히 ‘대낮 음주’에 각별히 주의해 달라”고 밝혔습니다. 심지어 “되도록 업무 중에는 마시지 말고 불가피하게 먹더라도 앞으로 소주만 먹으라”고 주종까지 콕 찝어줬다고 합니다.

진 전 부장의 취중 발언이 무엇이었기에 이 사달이 났을까요? 사건은 그 며칠 전인 99년 6월7일 오후 4시대에 벌어졌습니다. 이날 진 전 부장은 대전고검장 승진을 축하하러 들른 3명의 출입기자들에게 “조폐공사의 파업은 우리가 만든 거야”라는 말을 합니다. 발언이 문제가 되자 진 전 부장은 “그날 승진 대상자들이 참여한 점심자리에서 폭탄주 석 잔을 마셨다”면서 자신의 발언이 ‘취중실언’이었다고 주장합니다.

‘폭탄주가 부른 폭탄발언’에 검찰조직이 난리가 납니다. 이 발언 하나로 진 전 부장의 고검장 영전이 날아갔고, 옷로비 의혹 사건에도 겨우 자리를 버티고 있던 김태정 당시 법무장관이 낙마합니다. 그리고 새로 부임한 법무장관이 오자마자 폭탄주 단속에 나선 것이었죠.

새 법무장관의 당부에 검찰 수뇌부는 어떻게 화답했을까요? 당시 신승남 대검차장은 “폭탄주는 개개인이 양식에 따라 알아서 할 문제이지 ‘마셔라 마시지 마라’는 식으로 규제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날 박순용 검찰총장 주재로 열린 검사장회의에서도 폭탄주 규제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없었다고 합니다. 폭탄주 사랑이 유별나다고 알려진 검찰조직답게, 법무장관 발언 정도로는 ‘움찔’도 하지 않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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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6월10일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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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1면 톱기사도 파업유도 사건을 다뤘습니다. 여권이 국정조사권을 수용한 뒤 옷 로비 사건 등을 조사범위에 포함하느냐를 놓고 여야가 갈등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후 파업유도 사건은 옷로비 의혹과 함께 국정조사를 받게 됩니다. 진 전 부장은 국회 청문회에서 그날의 술자리를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당시 박순용 검찰총장을 포함해 인사대상에 포함된 검사장들이 대부분 참석했던 자리”였고 “처음에는 잔술(위스키)로 시작해 폭탄주가 오후 2시까지 계속됐다”고 말이죠.

그는 당시 발언이 실언이었다고 강조하고 싶었는지 “석 잔을 마셨지만 당시 상당히 취한 것 같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의원들은 “폭탄주 주량이 10잔을 넘지 않느냐”고 추궁했고, 그는 “컨디션에 따라 1잔을 먹고도 취한다”고 해명했다죠. “도대체 검사들은 왜 그렇게 폭탄주를 마시느냐”는 질문에는 “양주가 독하니까 맥주에 타서 먹는다”고 답했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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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6월10일 경향신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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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사회면에는 노동자들이 대검청사 앞에서 ‘폭탄주 시위’를 하는 사진과 기사도 실렸습니다. 그들은 “폭탄주 많이 드시고 진실을 밝혀달라”는 글을 적어 붙인 5000㏄ 맥주피처 용기에 폭탄주를 만들어 대검청사 정문 현판에 끼얹었습니다. 참여연대와 경실련 등 76개 시민·사회단체도 집회를 열어 “국정조사권과 특별검사제를 통해 이사건의 진상을 밝히라”고 요구했습니다. 대한변협도 “특별검사제를 도입하라”고 촉구했습니다. 기사는 파업유도 발언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노동계와 시민단체들의 총공세가 ‘6월 항쟁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라고까지 묘사하고 있네요.

이 사건은 결국 옷로비 의혹과 함께 사상 첫 특별검사제 수사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특검은 강희복 당시 조폐공사 사장에게 혐의를 몰아주고 진 전 부장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끝납니다. 그의 발언이 취중진담이었는지 취중실언이었는지, 진실은 본인만 알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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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와 맥주를 섞어 폭탄주를 만들고 있는 장면.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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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 이후 검찰은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폭탄주를 ‘공공의 적’으로 취급하게 되었다 합니다. 다만 실제 변화는 더뎠던 것 같은데요.

일부 검찰 인사들이 삼성그룹으로부터 ‘떡값’을 받았다는 의혹이 터져나온 2005년에 김종빈 당시 검찰총장은 전국 검사장 간담회를 열어 ‘폭탄주 안 마시기’ 등을 검찰 자정방안으로 논의했습니다.

또 2007년 대검찰청에서 검사 395명과 일반 직원 1570명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검사 10명 중 7명이 “폭탄주가 단합에 도움이 된다”고 답했습니다. 다만 검사의 34.9%가 폭탄주의 단점으로 ‘주량보다 과음해 실수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꼽았고, 젊은 검사들을 중심으로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왔다고 하네요.

저처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만, 언론계도 폭탄주를 사랑하는 조직 중 하나죠. 덕분에 어린 연차 때는 술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힘들기도 했고, 술로 인해 일어나는 사고들도 종종 봤던 것 같습니다.

사실 폭탄주가 무슨 죄인가요. 마구 마시고 일을 저질러놓고 술 탓하는 사람이 잘못이고,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강요하는 분위기가 문제죠. 이제는 스스로 저지른 일에는 술 탓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임소정 기자 sowh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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