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1 (화)

굴곡진 현대사 부딪혀온 이희호 여사, `인동초` 곁으로…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남편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더불어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부딪혔던 이희호 여사가 10일 별세했다. 2009년 8월 남편이 서거한 지 10년 만에 '인동초' 김대중의 곁으로 돌아갔다.

이 여사는 일제 치하에 태어나 해방과 분단,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결혼 전에는 독신을 고집하며 유학을 다녀온 뒤 한국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활약한 엘리트 여성이었다.

정치인의 아내가 된 후 남편이 수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것을 노심초사 지켜보며 험로를 걸었지만, 제15대 대통령 영부인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이 옥고를 치를 때는 옥바라지로, 망명 때는 후견인으로, 가택연금 때는 동지로, 야당 총재 시절에는 조언자로 곁을 지킨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내조자를 넘어 정치적 동지라는 평을 받았다.

이 여사는 1922년 의사였던 아버지 이용기 씨와 어머니 이순이 씨 사이의 6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유복한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해 일제 치하에서 이화고등여학교(이화여고 전신)와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대 전신)를 다녔다. 1950년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한 뒤에는 미국 램버스대와 스카렛대에서 유학했다.

1958년 귀국한 그는 대한YWCA 총무를 맡아 본격적으로 여성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혼인신고를 합시다', '축첩자를 국회에 보내지 맙시다'라는 구호를 만들어 가부장적 질서가 강한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여성운동에 나섰다.

여성문제연구회 회장을 맡아 남녀 차별적 법 조항을 고치기 위한 활동에 힘썼고, 여러 여성단체가 모여 출범한 '여성단체협의회' 조직화에도 앞장섰다.

여성운동에 매진하던 이 여사는 1962년 만 40세에 김 전 대통령과 결혼을 하면서 '정치인 아내'의 길에 들어섰다. 1951년 6·25 전쟁의 피란지인 부산에서 김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고, 10년 뒤 첫 부인과 사별한 그와 우연히 재회해 결혼에 이른 것이다.

결혼 후 삶은 정치적 역경을 거듭한 남편만큼 순탄치 못했다. 결혼 열흘 만에 김 전 대통령이 '반혁명 혐의'로 체포된 것이 시작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70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의 대선에서 95만표 차이로 낙선하며 일약 야권의 지도자로 부상했지만 역설적으로 부부에게는 험난한 여정의 시작이 됐다.

김 전 대통령은 1971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후 미국 망명(1972년), 납치사건(1973년), 가택연금과 투옥(1973∼1979년), 내란음모 사건과 수감(1980년), 미국 망명과 귀국 후 가택연금(1982∼1987년) 등 군사정권 내내 감시와 탄압에 시달렸다.

이 여사는 내란음모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사형 판결을 받았을 때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는 등 국제 사회를 향해 구명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정치적 해금이 이뤄지자 13대 대선에 도전했다가 실패했고, 1992년 14대 대선 역시 실패하자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1997년, 네 번째 도전 끝에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됐다.

청와대 안주인이 된 이 여사는 70대 후반의 고령임에도 아동과 여성 인권에 관심을 두며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김대중 정부에서 여성부가 신설되고 여성의 공직 진출이 확대되자 '국민의 정부 여성 정책 뒤에는 이희호가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는 퇴임 후에도 김대중도서관 개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무죄 등 주요 순간에도 늘 공식 석상에 남편과 함께했다.

2009년 8월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반평생 가까운 47년 부부 생활을 마감했다.

이후에도 그는 햇볕정책의 계승자로서 활발한 활동에 나서고, 매년 노벨평화상 수상 축하 행사를 개최하는 등 남편의 유업을 잇는 데 힘을 쏟았다.

2011년 12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조문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고, 2015년 7월에도 취약계층 의료 지원을 목적으로 방북했지만 기대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의 면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이 여사는 정치 불개입 입장을 취했지만, 여권의 상징적 '큰 어른'으로서 동교동 자택을 찾아오는 숱한 정치인을 격려하는 정신적 지주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자서전 '동행'에서 "참으로 먼 길을 걸어왔다. 문득 돌아보니 극한적 고통과 환희의 양극단을 극적으로 체험한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회고했다.

[디지털뉴스국]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