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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설움 많고 징한 인생… 한 판 춤으로 작별하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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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藝妓 권명화

6년 전 한 무대 올랐던 선배 장금도·유금선 먼저 보내고 추모 공연 '몌별 해어화' 열어

'채 맞은 생짜'라는 기생들 은어가 있다. 회초리 채를 맞으며 제대로 학습한 예기(藝妓)를 뜻한다. 반반한 얼굴 하나로 나무토막처럼 술만 따르는 '나무기생'과 다르다는, 자부심에 찬 말이다. 이 예기를 키워낸 곳이 권번(券番). 예기 지망생들은 권번에서 춤·소리·가야금·시조·서화 등 전인교육을 받았다. 4년간의 혹독한 교육을 통과해야 인력거 타고 요정에 나가 기예를 펼칠 수 있었다.

지난 2013년 우리 시대 마지막 예기 3인이 한 무대에 올랐다. 민살풀이춤 전수자인 군산 장금도(1928~2019), 동래학춤 구음(口音) 보유자인 부산 유금선(1931~2014), 달구벌춤의 봉우리라는 대구 권명화. 평균 나이 82세였던 그들의 무대는 전석 매진에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로부터 6년. 장금도와 유금선은 고인이 됐고 이제 단 한 사람 남았다. 마지막 예기 권명화(85) 명인이 먼저 간 언니들을 추모하는 춤판을 펼친다.

천번 만번 반복해야 춤사위가 나온다

"요즘으로 치면 대학원 나온 정도가 그 때 기생이에요. 절대 술잔에 술 안 붓습니다."

12일 서울 충무로 한국의집에서 만난 명인은 쪽진 머리에 연두색 스카프를 두르고 나타났다. "무용하는 사람은 화장이 기본"이라며 "옛날엔 머리밖에 볼 게 없어서 궁둥이까지 왔었는데 이걸 까부면 한 냄비라… 나이 먹어 귀찮아서 이젠 다 끊어(잘라)버렸다"고 했다. 눈빛에 기가 넘쳤다.

조선일보

85세 명인의 눈빛에 기가 넘쳤다. ‘마지막 예기’ 권명화 명인이 서울 충무로 한국의 집에서 소고춤을 선보이고 있다. 20~21일 ‘몌별 해어화’ 공연에서 선보일 춤이다. /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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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김천의 세습무가에서 태어나 장구 소리를 듣고 자랐다. 밤이면 동생을 업고 굿판을 따라다녔다. 6·25로 피란한 곳이 대구 남산동, 대동권번 옆집이었다. 연일 덩쿵대며 들려오는 풍악 소리가 그를 사로잡았다. 아버지 돈을 훔쳐 권번에 들어간 그는 풍류의 대가 박지홍을 수양아버지 삼아 가무를 익혔다. 소리는 두각을 못 냈지만 춤은 언제나 앞서갔다. 대구 무형문화재 제9호 살풀이춤 보유자이자 박지홍류 승무의 계승자다. "손 한번 툭 올리는 동작도 천번을 반복해라, 우린 그렇게 배웠어요. 천번 만번을 반복해야 춤사위가 나온다 했거든. 그 말씀이 진리라요."

무당 집안이라 신내림을 피하려는데, 하루는 갓 낳은 딸이 아팠다. 신을 받지 않으니 딸을 데려가려나 싶어 내림굿을 자청했다. 낮에는 무용 선생, 밤에는 '족집게 선생'으로 살았다. 지금도 그는 대구와 서울의 무용학원을 오가며 제자 양성에 힘을 쏟는다. “아무 데나 부른다고 가지 마라. 한 가지를 춰도 너희 춤 볼 줄 아는 무대에 서라”고 호통치는 스승이다.

팔순에 추는 승무는 예순 살 발레리나의 32회전만큼이나 어렵다고 한다. 무릎이 아프고 뼈가 시려도 권씨는 매달 무대에 오른다. “죽는 그날까지 춰야제. 85세인 나도 무대에서 춤을 추니 노인들이 와서 보고 우리도 힘을 내야겠다 하지 않겠습니까?”

소매 부여잡고 보내는 몌별의 춤

조선일보

장금도, 유금선


권명화는 20~21일 한국문화재재단 주최로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열리는 '몌별(袂別) 해어화' 공연에서 소고춤을 춘다. 몌별은 소매를 잡고 작별한다는 뜻. 해어화(解語花)는 '말을 알아듣는 꽃'이란 의미로 기녀를 가리키는 말이다.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이 기생 베개란 말이 있어요. 술 냄새, 분 냄새에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 마를 날 없이 배어 있어서. 밤새 눈물 닦으며 예술을 익혔던 예기 두 분을 추모하는 무대입니다." 6년 전 세 여인을 무대로 끌어낸 진옥섭 한국문화재재단 이사장은 "올해 최고의 판이 될 것"이라고 했다.

장금도는 민살풀이춤 판을 벌인 마지막 예인이었다. 부산 동래 유금선의 구음(口音)은 "되놈 송장도 일어나 춤출 소리"라고들 했다. 승무의 국수호, 동래학춤 이성훈, 민살풀이춤 김경란이 함께 무대에 오른다. (02)3011-1721




[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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