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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기생충’ 가정부 이정은 “주윤발처럼 되고 싶어요. 그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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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만으로 장르 바꾸는 신스틸러

'미스터 션샤인 '눈이 부시게' 이어

연기 호평 쏟아지는 28년차 배우

연극영화과 시절에는 연출만 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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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에서 이정은이 연기한 박사장네 입주가정부 문광. [사진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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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 이름이 ‘문광’이라니까 제 딴엔 문(門)이나 광(廣)하고 상관있나, 영어 문(Moon‧달)을 써서 달밤에 미친 광녀인가, 여러 상상을 했죠. 감독님한테 뜻을 물어보진 않았어요. 워낙에 딱 이거다, 얘기 안 하시는 편이라.”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에 더해 75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기생충'의 배우 이정은(49)의 말이다. 빈부 양극화를 꼬집은 이 희비극에서 그가 맡은 문광은 부잣집 박사장(이선균)네 입주가정부. 비중으론 조연이지만 관객 백이면 백 그를 신스틸러로 꼽는다. 쏟아지는 호평에 그는 "이야기가 좋으면 출연분량은 1분이든 2분이든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해왔다"며 "약간 부담도 되지만 계속 열심히 하란 격려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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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이 직접 찍은 '기생충' 700만 돌파 인증샷. [사진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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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보러 온 봉감독의 기립박수
연기경력 28년의 그가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 건 2009년 '마더'부터 이번이 세 번째. 2년 전 ‘옥자’에선 슈퍼돼지 옥자의 목소리를 맡았다.

“나름 타이틀롤이잖아요, 옥자가. 감독님의 주문이 추상적이었어요. 감정이 느껴지는 숨소리, 소녀가 떠나서 그리워하는 울음소리…. 상상 속 캐릭터다 보니 비슷한 짐승 소리를 발췌하고 엄청나게 준비했죠. 감독님이 ‘너무 많이 노력하셨다’더니 ‘저하고 앞으로 말도 안 되는 걸 하자’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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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이정은이 목소리 더빙한 슈퍼돼지 옥자다. 친구인 산골소녀 미자(안서현)와 애틋한 감정연기를 선보인다. [사진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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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봉 감독과 첫 만남은 어땠나.



A :
“제가 ‘마더’ 오디션을 한 3차까지 보고 감독님 미팅을 했다. 아주 작은 역인데도 내 이름을 부르며 어마어마하게 신경 쓰시기에 덩달아 더 열심히 했다. 그러고 잊고 있었는데 원빈씨, 송새벽씨랑 같이 창작뮤지컬 ‘빨래’를 보러 오셨더라. 감독님이 워낙 덩치 있잖나. 끝날 때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셔서 얼떨결에 객석에 기립박수가 물결쳤다. 그때부터 ‘서글서글하고 캐릭터 만들 때 여러 지점이 있는 목소리’라며 관심 있게 봐주시더니 ‘옥자’에…(웃음).”

※ 이후의 기사에는 영화 ‘기생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있습니다.




Q : '기생충'은 ‘옥자’ 시사 때 제안을 받았다고.



A :
“내년 스케줄 좀 비워놓으라며 감독님이 한장짜리 콘티를 주셨다. 문광이 벽 위쪽에 달라붙어 뭘 밀고 있었는데 어디 갇혔나 싶더라. 재밌고 이상한 영화라는 말에 도전 욕구가 생겼다. 전체 시나리오는 작년 5월 촬영 들어가며 봤는데, 너무 좋더라. 부자와 빈자, 그 사이의 어떤 지하방. 예전에, 중국이 굉장히 번화한 뒤에도 여전히 지하세계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사진을 본 적 있는데 그 사진을 다시 찾아봤다. 다만 제가 너무 귀염상인데 이만한 공포 효과가 날까, 그게 좀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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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에서 문광이 박사장네에 과외면접을 보러 온 기우(최우식)을 맞는 첫 등장 장면. 사모님으로 오해 받을 만큼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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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님 같은 가정부 "제일 짜릿했죠"
문광의 첫 등장은 우아하다. 이정은은 “실제 그런 부잣집에 한번 가봤는데 가정부 어머님들이 워낙 품위 있으시다. 누가 주인인지 모를 만큼. 외제차 몰고 다니고 쉬는 시간엔 독서도 하신다”고 했다. “아마 직업상 요구 받겠죠. 감독님도 그런 인물을 주문하셨어요.” 박사장네에 과외교사 면접을 보러온 기우(최우식)를 맞이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저도 얹혀살면서, 내가 뭐라고 아직 고용 안 된 청년을 야리면서 커피잔을 들고 건방지게 걷잖아요. 거의 물아일체. 저는 그 장면을 볼 때 어떤 클로즈업보다 짜릿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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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의 과외 모습을 안주인처럼 챙기는 문광. 비극이 닥친 뒤엔 180도 다르게 변모한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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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중반, 비에 쫄딱 젖은 그가 박사장네 인터폰 화면에 비치는 장면은 등장만으로 섬뜩하다고 호평받았다.



Q : 그 인터폰 장면이 첫 촬영이었다고.

A :
“두 번째다. 그전에 해고되고 쫓겨나는 장면이 먼저였다. 인터폰은 다들 무서웠다던데 전 사실 웃기지 않을까 했다. 영화를 본 친구들은 저 술 취했을 때 같더란다. 제 딴엔 상대를 안심시키고 싶어서, 귀엽고 예의 바르게 되게 착한 사람처럼 구는데 남들 눈엔…(웃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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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칸영화제 초청 당시 '기생충' 여성 배우들의 한컷. 이정은은 "여성 배우들이 많아 서로간의 케미, 기싸움을 신나게 즐겼다"고 돌이켰다.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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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영화에는 안 나오지만, 문광은 어쩌다 남편을 4년 넘게 숨어 살게 했을까.

A :
“죽는 것보단 나으니까. 남편은 사업도 안 되는 것만 골라서 하는 사람이다. 사채업자를 피해 지하실에 살게 돼서도 나중에 나가면 뭔가 시험이라도 칠 것처럼 읽지도 않을 법전을 끼고 산다. 제가 가정부일 하면서 서포트하지만, 푸른 꿈을 안고 살기엔 너무 세상 물정 모르는 순박한 부부다. 그러나 정직하고 끈끈하다. 비밀 가진 사람들의 결속력, 연대감이 더 강해지잖나. 제가 뮤지컬 ‘빨래’에서 장애인이 없는 것처럼 숨기는 역할이었는데 감독님이 그걸 연상하셨는지도 모르겠다.”



Q : 남편 근세를 연기한 박명훈은 오랜 동료라고.

A :
“2005년 연극 ‘라이어’ 초연하며 처음 만났다. 이번 캐스팅에 서로 놀랐다. 아이 없는 부부가 어떻게 살아왔을지 명훈씨와 많은 얘길 나눴는데, 지하에서 몸이 묶인 그가 죽어가는 저를 바라볼 때 굉장히 큰 분노, 안타까운 기운이 온전히 느껴졌다.”

독립영화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박명훈은 봉 감독이 박석영 감독의 ‘재꽃’을 보고 “술 취한 연기는 세계 최고”라며 캐스팅한 배우. '기생충'에서 부부의 실체, 특히 남편 근세는 존재 자체가 스포일러라서 박명훈은 개봉 전 공식행사에 한번도 참석하지 못했다. 이정은도 개봉 10여일이 지나서야 인터뷰에 나섰다. “명훈씨가 칸까지 가서 레드카펫도 못 서고 공식상영도 2층 객석에서 따로 봐서 안타까웠어요. 근데 얼마 전 무대인사 갔더니 명훈씨한테 ‘리스펙!’ 하는 극중 대사가 쏟아지고. 아이돌급 인기를 실감했죠.”

북한 말투, 리춘희 아나운서 연구해
극 중에는 부부가 북한 아나운서 흉내를 내며 노는 모습이 나온다. 이들의 지하공간도 북한군의 공격 등 전쟁이나 재난에 대비해 건축가가 남몰래 만든 것이란 설정이다. 이정은은 “감독님이 북한 관련 조크를 하면 좋겠다고 저랑 닮은 리춘희 아나운서 자료를 많이 보내주셨다”면서 “해외 사이트를 보니 외국인들도 많이 흉내 내더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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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광에게 비극의 기운이 닥쳐오는 장면. 극중 그의 복숭아 알레르기 설정은 봉 감독이 자신의 학창시절 친구 경험담에서 따온 것. [사진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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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처럼 벽에 달라붙는 독특한 몸놀림은 액션스쿨에서 훈련받아 와이어를 매달고 소화했다. 계단을 굴러떨어질 땐 ‘시크릿 가든’의 길라임 스턴트를 맡았던 유미진 등 남녀 대역 2명이 동원됐다.

김혜자 선생님에 반응하면 그게 곧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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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이정은이 노쇠한 혜자(김혜자)와 마주한 모습. [사진 네이버웹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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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에 앞서 이정은은 지난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함블리’로 사랑받고 올해 초 ‘눈이 부시게’로 백상예술대상 조연상을 차지했다. 이런 그에게 동료 배우 이선균은 “우주의 기운이 모였다”고 했단다. 올해 배우 김윤석의 감독 데뷔작 ‘미성년’에서 바닷가 촌부 역으로 짧고 굵게 인상을 남겼다. 지금도 상영 중인 ‘우리 지금 만나’에선 북한에서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는 중년여성을 연기했다.

특히 ‘눈이 부시게’의 열연에 감탄을 표하자 그는 겸손 또 겸손했다. “제가 결혼을 안 했다 보니까 치매 시어머니를 모시는 부부의 그 건조함을 표현하는 게 정말 힘들었거든요. 그럴 때 김혜자 선생님을 뵈면 제가 뭘 하는 게 아니라 선생님이 주신 걸 받기만 해도 그게 연기가 됐어요.”

어머니는 배우상 아닌 것 같다 하셨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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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N 새 시리즈 '타인은 지옥이다' 원작 웹툰. 맨 왼쪽이 이정은이 연기할 고시원 주인이다. [사진 네이버웹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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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하반기 방영될 웹툰 원작 호러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에선 의뭉스러운 고시원주인 엄복순 역에 캐스팅됐다. 배우로서 꾸준히 신뢰받는 비결을 묻자 그는 “웬만하면 유쾌하게 촬영하려는 노력을 좋게 봐주신 것 같다”고 했다.

“괴로움이 있어도 일을 다 끝내고 요구사항을 전달하죠. ‘리허설배우’란 별명도, 연습할 때도 동료들이 실감 나게 하도록 실전처럼 맞춰주다 보니 생겼어요. 저희는 인생의 많은 부분을 현장에서 보내잖아요. 고인이 되신 김영애 선생님이나 여러 선배님을 보며 배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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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박보영 주연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에서 처녀귀신을 알아보는 서빙고 보살 역으로 주목받은 이정은. [사진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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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다닐 땐 거의 연극 연출만 했다는 그다. “어머니도 배우상은 아닌 것 같다시고,(웃음) 근데 제가 사람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거 좋아했거든요. 점점 나설 기회가 없으니 쭈그렁탱이가 되는 거예요. 박광정 오빠가 대학로 연극연출하는데 도와달라기에, 제가 연출부로 세 작품 하면 무대에 배우로 세워 달라 딜을 했죠.” 그렇게 따낸 출연작이 1994년 외계소녀의 서울 유랑기 ‘저 별이 위험하다’. 이 연극에서 그는 인신매매범 역할로 맘껏 웃음을 터뜨렸다. 첫 연기 데뷔작은 대학생이던 91년 연극 '한여름밤의 꿈'이지만, 대학로에서 정식으로 배우활동을 한 건 이때부터다.

“마음을 내려놓는 법을 더 먼저 배운 것 같아요. 어떤 역이 오더라도 즐겁게 하며 버텨왔고, 아니, 버틴다기보단 내가 봐도 좋은 이야기에 일조하는 게 재밌었어요. 작품은 전적으로 작가와 감독의 역량이거든요. 이번에 저보고 연기 잘했다고 하시는데 이미 그렇게 두드러질 수 있는 역이었어요. 우리(배우)는 거기에 몇 프로 창조성을 더할 뿐이에요.”

주윤발 되고 싶어요, 그분처럼 노후에...
요즘도 친구들 만나고, 강아지와 산책하고, 운전을 즐기고, 한강 가서 대본 외는 일상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다.

“저는 주윤발이 되고 싶어요.” 그가 뜻밖의 이름을 꺼냈다. “그분처럼 평범하게 노후에 지하철 타고 일반 대중 속에 있고, 그런 모습이 좋아요. 남주혁씨(‘눈이 부시게’)처럼 팬이 막 몰려드는 정도 말고, 길 가다가 ‘아유, 어디서 봤어, 같이 사진이나 찍어’ ‘먹구 가’ 하는 정도의 인기라면 즐겁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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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 제작진이 22일 제72회 칸영화제 경쟁부문 갈라 상영 후 기립박수를 받고 있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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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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