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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보희와 녹양` 싱그러운 여름 소년 소녀의 성장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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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영화 `보희와 녹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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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유창 기자의 시네마&] 14세 동갑내기 보희(안지호)와 녹양(김주아)은 단짝 친구다. 사람들이 자주 헷갈려하지만 보희가 남자고, 녹양이 여자다. 보희는 여성스러운 이름 때문에 학교에서 놀림을 받고 개명을 고민하는 섬세하고 여린 소년이다. 반면 녹양은 '녹색 태양'이라는 뜻의 이름처럼 당차고 밝은 성격으로 보희를 옆에서 챙겨준다. 보희는 녹양을 '베프'라고 소개하지만, 녹양은 보희가 '불알친구'라고 말할 정도로 거침이 없다.

엄마(신동미)와 단둘이 사는 보희는 어릴 때 사고로 죽은 줄 알았던 아빠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뒤 녹양과 함께 아빠를 찾아 나선다.

푸릇푸릇한 여름을 배경으로 소년 소녀가 아빠를 찾아 나서는 모험담인 영화 '보희와 녹양'은 자극적인 장면 없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착한 영화다. 장난기 많은 녹양과 소심한 보희의 꾸밈없는 모습은 관객이 두 캐릭터에 푹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아직 중학생이지만 베프에서 연인으로 나아갈 듯 말 듯한 귀여운 에피소드들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진다. 보희 아빠가 과연 누구인지를 미스터리 구조로 제시해 관객이 이야기에 몰입하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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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희와 녹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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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주인공인 이 영화에는 두 가지가 없다. 우선 나쁜 어른이 없다. 술 마시고 행패 부리는 어른도 없고, 범죄와 일탈을 부추기는 어른도 없다. 갈등이 발생하더라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인상이 험궂고 첫 등장이 무뚝뚝해 보였던 보희 사촌누나의 남자친구 성욱(서현우)도 결국 좋은 어른이 되어준다. 다만 재미없게 사는 어른은 많다. 녹양은 이렇게 말한다. "어른들은 원래 다 그렇지 않나."

둘째, 심각한 주제의식이 없다.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많은 영화들은 아이들 행동에 빗대어 어른들 세상을 비판하곤 하지만 이 영화는 그와 같은 상징을 심어놓는 데는 관심이 없다. 그 대신 두 아이의 캐릭터를 생생하게 만드는 데 집중한다. 학교폭력과 왕따 상황이 잠깐 등장하지만 영화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다. 동시대 청소년 문제 같은 심오한 문제의식이 없어도, 영화는 가족과 친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여린 소년을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것으로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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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희와 녹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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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보희는 아빠 찾기를 계속해야 할지 망설인다. 성욱은 만약 아빠가 나쁜 사람이거나 너를 아예 잊어버렸다면 찾아도 후회할 거라고 다그친다. 그럴 때마다 녹양은 보희에게 멈추는 것보다 계속하는 것이 더 가치있다며 동기를 부여해준다. 녹양은 영화 속에서 계속해서 휴대폰을 들고 촬영하고 있다. 영화를 만들고 있느냐는 성욱의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반문한다.

"꼭 뭘 해야 돼요?"

녹양이 툭 내뱉는 이 대사는 영화의 태도를 드러내준다. 우리는 무언가를 할 때 그 순간을 즐기기보다는 결과물에 집착하곤 한다. 하지만 결과물은 과정이 끝나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결과물이 나온 후에는 과정으로 돌아갈 수 없다. 따라서 과정을 즐기기 위해선 결과물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보희는 영화의 결말 부분에 이르러 아빠의 정체를 알게 된다. 하지만 사실 아빠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아빠를 찾아다닌 과정 속에서 아이들이 성장했다는 것이다. "언젠가 찍어놓은 분량이 많아지면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녹양의 긍정적인 태도는 영화 내내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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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희와 녹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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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희와 녹양'은 '파수꾼' '소셜포비아' '죄 많은 소녀' '수성못' 등 뛰어난 독립영화를 배출해 충무로 진출 패스트트랙 역할을 하는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과정 11기 작품이다. 영화를 만든 안주영 감독은 당초 보희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영화를 구상했다가 이를 장편으로 키우며 녹양 캐릭터를 보강했다. 아역배우 출신인 15세 동갑내기 안지호와 김주아는 캐릭터 의존도가 절대적인 이 영화에서 반짝반짝 빛난다.

지난달 29일 개봉한 '보희와 녹양'을 상영 중인 극장은 많지 않다. 하지만 무겁거나 화려한 영화들 속에서 산뜻하고 가볍고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귀여운 영화를 찾는다면 늦기 전에 두 소년 소녀를 만나보길 권한다.

[양유창 기자 sanity@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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