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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박완규칼럼] 고슴도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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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큰 것을 아는 고슴도치 /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여우 / 하나의 비전에 매달리지 말고 / 지혜와 분별력 발휘해야 할 때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 고대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의 말이다. 여우가 온갖 교활한 꾀를 부려도 고슴도치의 한 가지 확실한 호신법을 이겨낼 수 없다는 뜻이다. 고슴도치는 위험에 처했을 때 몸을 웅크리고 온몸의 가시털을 잔뜩 세워 자신을 방어하므로 살아남는 데는 여우를 능가한다는 것이다. 아르킬로코스는 스스로를 고슴도치에 비유했다. “그 하나 덕에 명성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영국 정치사상가 이사야 벌린은 저서 ‘고슴도치와 여우’에서 아르킬로코스의 말을 빌려 인간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눈다. “한 부류는 모든 것을 하나의 핵심적인 비전, 즉 명료하고 일관된 하나의 시스템과 연관시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런 시스템에 근거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생각하며 느낀다.” 고슴도치형이다. 하나의 중심적 가치를 지향한다. 자칫 맹목적이기 쉽다. 성급한 일원론자다. “다른 한 부류는 다양한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고 행동지향적이며, 생각의 방향을 좁혀가기보다는 확산시키는 경향을 띤다.” 여우형이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다양한 사고를 중시한다. 하나의 비전에 자신을 맞추려고 애쓰지 않는다. 신중한 다원론자다. 벌린은 이러한 이분법이 지나친 단순화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세상을 관찰하고 비교하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한다고 했다.

세계일보

박완규 논설실장


우리 주변을 돌아보자. 남보다 큰 발언권을 지닌 이들은 대부분 고슴도치형이다. 하나의 비전에 몰입한다. 상황이 바뀌어도 그것을 고수한다. 수많은 변수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을 하나의 비전에 꿰맞추어 해석하려 드니 정확도가 떨어지고 무리수가 따른다. 정제되지 않는 말을 쏟아내기도 한다. 이런 고슴도치들이 고함을 내지르니 여우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고슴도치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 정치권과 그 주변에서 나오는 얘기를 들어보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정치권의 고슴도치들은 나라 안팎의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는 상관없이 몸을 웅크리고 가시털을 세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논란을 대단한 화두인 양 키우고 저들끼리 치고받는다. 편 가르기가 심하다. 편이 다르면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 공론장에서는 국정 의제가 사라지고 정쟁만 되풀이된다. 국회의 현주소다. 올 들어 문 연 날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정치가 실종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혐오 혹은 탈정치·반정치가 요즘처럼 심한 적이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치권의 자업자득이다.

근대 초기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 이런 말을 남겼다.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바를 행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하는 바를 고집하는 군주는 권력을 유지하기보다는 잃기가 십상이다.” 정치학자 김영민은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서 “잘 입안된 비전이 존재하더라도, 미처 예상치 못한 권력투쟁과 우연(fortuna) 때문에 비전이 실현되지 못하곤 하는 곳이 바로 정치의 세계”라며 “선한 심성만으로는 비전을 구현해낼 수 없다. 이 세계에서는 임기응변과 능청을 통해서라도 험로를 헤쳐 나갈 정치적 역량(virtue)이 필요하다”고 했다.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동물학자들에 따르면 고슴도치의 천적 중 하나가 여우다. 현실에서는 고슴도치의 호신법이 꾀 많은 여우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하나의 비전에만 의지할 경우 그게 먹혀들지 않는 상황에선 속수무책인 것이다. 우리 앞에 산적한 외교안보·경제 등 국정 현안들은 난제투성이다. 아무리 꾀를 부려도 앞날을 열어나가기 어려운데 하나의 비전에 매달리다간 문제의 해법을 찾기 난망하다. 고슴도치의 원대한 비전에 미혹돼 그것에 갇히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고슴도치의 비전보다는 여우의 지혜와 분별력이 더 필요한 때다. 여우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우리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 정치권부터 바뀌어야 한다.

박완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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