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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세계와우리] 미국의 냉전합의, 한국의 신냉전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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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50년대 소련봉쇄 정책 당시 / 정치권·국민 모두 국가적 합의 / 美·中 패권 경쟁에 신냉전 도래 / 한국 외교안보 초당적 협력 시급

본격적인 미·중 패권경쟁의 시대다. 적지 않은 전문가들이 미·중 신냉전 시대에 적합한 한국의 외교안보 대계(大計) 도출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의 신냉전 전략이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신냉전에 대한 국가적 합의’가 필요하다.

1950년 초 미국사회에 형성된 ‘냉전에 대한 합의(Cold War Consensus)’는 소련을 봉쇄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적극적인 국제주의 외교노선과 군사정책, 그리고 대통령의 외교안보정책 권한 강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초당적 합의였을 뿐만 아니라 행정부, 국회, 미디어, 일반국민이 모두 공유한 국가적 합의사항이었다. 이에 정권이 교체돼도 미국의 냉전 전략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이러한 국가적 합의는 훗날 냉전 승리의 기반이 됐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국가적 합의 도출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세계일보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국제정치학


우선, 소련 공산주의 위협의 실체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소련은 미국과 같은 편에서 2차 대전을 치렀고 실제로 연합군의 승리에 일정 기여를 했다. 따라서 전후 소련에 대한 미국인들의 평가는 꽤 우호적이었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오시프 스탈린을 ‘엉클 조’(Uncle Joe)라는 애칭으로 부를 정도였다. 스탈린이 동유럽에 친소 공산정부를 옹립하자 2차 대전 승리에 기여한 소련에 동유럽을 합당한 전리품으로 인정해 줘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어, 뿌리 깊은 미국의 고립주의 외교전통도 방해요인으로 작용했다. 대다수 미국인은 전쟁이 종식됐음에도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고 방위조직을 확장하며 국방예산을 증가하자는 제안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미국은 1차 대전 이후와 마찬가지로 2차 대전 이후에도 전쟁 중 급격히 증가한 군비를 축소하고 동원해제령을 단행하게 된다.

무엇보다 외교안보정책의 정치화가 냉전의 합의 도출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냉전의 설계자’ 조지 케넌은 1947년 익명의 기고문에서 “소련이 공산주의의 국제적 팽창을 기도하고 있으니 이를 봉쇄해야 한다”는 주장을 개진했다. 이를 필두로 미국의 외교정책 전문가 집단은 소련 봉쇄와 군비 증강에 한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민주당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전시에 증가된 국방예산을 더 과감하게 삭감하라는 여론에 부딪히고 있었다. 1944년 대선에서 패배한 공화당에게 연방정부의 재정적자 문제는 1948년 치러질 선거에서 가장 좋은 공격거리였다.

이런 제약 때문에 대소 봉쇄정책에 대한 지지 세력이 행정부와 전문가 집단 내에 구축됐음에도 냉전의 합의 도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당장 트루먼 행정부가 추진했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창설과 마셜플랜이 공화당의 반대에 부딪혔다. 전후 미국사회의 분위기를 감안했을 때 서유럽에 대한 집단안보 제공과 적잖은 예산이 소요되는 유럽재건 정책을 공화당이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시 공화당 유력 대선후보였던 아서 반덴버그 상원 외교위원장 역시 처음에는 트루먼 행정부의 제안에 회의적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트루먼 행정부는 몇 달에 걸쳐 반덴버그뿐만 아니라 유력 공화당 지도자를 대상으로 끈질긴 설득에 나섰다. 트루먼 대통령은 주요 외교정책 추진에 앞서 국내정치적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는 점을 숙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공화당은 나토와 마셜플랜 추진을 대선 이후로 미룬다는 조건 하에 트루먼 행정부의 정책에 초당적 협력을 약속했다. 이러한 초당적 협력이 있었기에 냉전 국가합의의 초석이 된 ‘반덴버그 결의안’이 통과될 수 있었다. 반덴버그는 그후 “당파정치는 국경선에서 멈춰야 한다(politics stops at the water’s edge)”는 명언을 남겼다.

이제 미·중 신냉전은 한국 외교의 가장 중요한 상수(常數)가 됐다. 한국 역시 신냉전 시대의 국가적 합의가 절실한 이유다. 이전투구의 한국 정치판에 ‘반덴버그 정신’을 요구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함) 격일까.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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