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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이수연 PD의 방송 이야기] '설정 취재원'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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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수연 TV조선 시사제작부 PD


최근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한 지역 방송사 중징계를 결정하고 전체 회의에 부쳤다. 취재기자가 음성을 변조해 관계자나 환자인 것처럼 속여 방송했다는 것이다. 필자도 처음 들어 보는 허위 보도다.

프로그램을 제작하다 보면 취재원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다. 아이템에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선 실제 경험자의 증언이 필요한데, 사안에 딱 맞는 사례자를 찾기가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작진은 일명 '맘카페'나 각종 커뮤니티를 샅샅이 뒤져 비슷한 사연을 찾거나, 아예 제작진 이름으로 "이러이러한 일을 경험한 분을 찾습니다"라는 글을 올려 사례자를 찾곤 한다. 하지만 이렇게 찾은 일부 사례자 중엔 제작진을 속된 말로 '멘붕'에 빠뜨리는 경우가 있다.

방송 생활 초기 뉴스 제작물을 담당할 때였다. 불량 주방용품 관련 아이템이라서 주부 사례자를 섭외했다. 사전에 사례자와 전화로 논의했기 때문에 그날 촬영은 순조로울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사례자 집에서 실험을 위해 부탁한 음식 재료를 달라고 하자, 사례자가 냉장고를 한참 뒤져서야 '발견'했다. 또 "제가 전화로 부탁드린 ○○ 있죠?"라고 물을 때마다 금시초문이란 표정을 짓는 것이다. "제가 통화한 ○○○씨가 맞느냐?"고 물으니 그제야 "아니다"라고 답했다. 기절초풍할 일이라 "그럼 당신은 누구냐?"고 물으니, 집주인이 촬영이 겁난다며 이웃 아주머니를 불러 놓고 몸을 피했다는 사실을 실토했다. '속았다'는 황당함은 둘째고, 그날 촬영에 동원된 스태프들을 생각하니 민망하고 미안한 마음에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생한 것이 아까워도 그날 촬영분은 모두 폐기해야 했다. '나도 속았다'는 말로 허위 취재원을 눈감고 넘어갈 순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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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을 하다 보면 손쉬운 선택을 하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한 번인데 어때' '아는 사람이 편하지' '아무도 모를 거야'. 아무도 몰라도 제작하는 당사자는 안다. 그렇게 제작한 방송이 얼마나 부끄러운 결과물인가를. 방송인이 진정성 있는 취재원을 찾는 것은 시청자뿐만 아니라 바로 자신을 위한 노력이다.



[이수연 TV조선 시사제작부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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