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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삼성 LCD 한혜경, 산재 인정에 10년 걸린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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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30일 정오, 한혜경씨(41)의 어머니 김시녀씨(62)의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가 연달아 들어왔다. “어머니, 혜경씨 산재 인정됐어요. 축하드려요!” 한혜경씨의 산재 신청을 대리한 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반올림) 노무사, 활동가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순간 김씨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김씨는 숨을 크게 한 번 내쉰 다음 딸에게 산재 인정 소식을 알렸다.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던 혜경씨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참을 소리 내어 울었다. 혜경씨는 뇌수술 후유증으로 눈물을 흘릴 수 없다. 소리로 울음을 표현한다. 그러다가 혜경씨는 환하게 웃었다. 모녀는 서로를 보며 웃다가 울기를 반복했다.

혜경씨는 1995년 11월부터 2001년 7월까지 5년 9개월 동안 삼성전자 LCD(현재는 삼성디스플레이주식회사) 기흥공장에서 일했다. 생리불순과 면역력 약화 등의 이유로 회사를 그만뒀다. 그러다 2005년 10월 뇌종양 진단을 받고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 후유증으로 시각장애 1급, 보행장애 1급, 언어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평생 재활치료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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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산업 피해자 한혜경씨가 6월 10일 강원도 춘천 자택에서 재활운동을 준비하고 있다. / 이하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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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학이 밝혀내지 못했으니 산재 아니다?

혜경씨의 ‘산재 인정 투쟁’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혜경씨는 2009년 3월 반올림과 함께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했다. 자신이 기흥공장에서 다룬 물질들이 뇌종양을 유발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혜경씨는 솔더크림(납), 플럭스, IPA(이소프로필 알코올), 아세톤 등 유해화학물질을 다뤘고 교대·야간근무도 잦았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산재가 아니라고 했다. 이후 근로복지공단 심사(2010년), 재심사 청구 결과(2011년)도 마찬가지였다. 근로복지공단의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을 했지만 1심(2013년), 2심(2014년), 3심(2015년)에서 모두 패소했다. 지난 10년 동안 총 여섯 번을 졌다.

근로복지공단과 재판부의 판단은 간단했다. 뇌종양이 납에 노출돼 발병됐을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현재까지 나타난 사정만 가지고는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 뇌종양은 현대의학상 발병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고, 납과 뇌종양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다양한 연구결과가 있다고 했다. 즉 현대의학이 밝혀내지 못했으니 산재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혜경씨는 이런 판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게다가 근로복지공단과 재판부는 혜경씨가 취급한 여러 가지 유해물질 중 솔더크림만 중점적으로 살펴봤다. 그나마 납이 가장 잘 알려진 유해화학물질이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납을 발암물질로 규정한다. 혜경씨는 주걱으로 솔더크림을 떠서 전자회로기판에 바르고 눈으로 확인하는 작업을 했다.

이때 납땜이 잘 되려면 플럭스를 사용해야 했다. 플럭스는 주로 송진(로진, 레진), 유동성 첨가제, 솔벤트 등으로 구성되는데 여기에서 벤젠과 같은 발암물질이 나온다. 안전보건공단은 2012년 플럭스를 유해화학물질로 규정했다. 혜경씨가 산재를 신청한 2009년에는 이런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근로복지공단은 혜경씨가 일했던 작업환경을 조사해본다고 했다. 혜경씨가 일하던 공장은 문을 닫았기 때문에 새로 지어진 공장을 조사했다. 새로 지어진 공장은 이전과는 많이 달라진 상태였다. 조사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혜경씨 외에도 삼성반도체에서 근무하다 혈액암에 걸린 ㄱ씨는 2015년 현장조사를 다녀온 뒤 답답함과 막막함을 토로했다.

“현장은 내가 일하던 때와 많이 달랐다. 2층에 들어서니 기존 설비 대부분이 거의 없어지고 새로 입고된 설비들이 눈에 띄었다. 설비 내부 열기를 식힐 때 챔버를 열지 않아도 물을 주입해 자동으로 온도를 조절할 수 있도록 개선돼 있었다. 내가 일했던 작업공정 설비의 경우 위치와 배치, 구조가 모두 달라져 있었다. 모든 설비들이 전반적으로 문제점이 보완되고 개선돼 있었다.”

“역시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혜경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싸울수록 자신이 처한 상황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알리기 위해서라면 어디든지 갔다. 언어장애 때문에 유창하게 말을 하지는 못하지만 혜경씨 발언에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2014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탐욕의 제국>에서 혜경씨는 삼성전자 사옥을 향해 “믿어져요? 내가 장애인이 됐어요. 화가 나서 미쳐. 이건희 이 나쁜 놈아”라고 소리지른다. 몇 번을 돌려봐야 이해할 수 있지만 그래서 더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15년 10월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며 1022일 동안 노숙농성을 했다. 혜경씨가 강원도 춘천 집에서 장애인 콜택시를 타고 서울까지 가려면 3시간이 훌쩍 넘게 걸린다. 그렇게 10년을 보내니 장애인 콜택시 운전사들이 혜경씨를 먼저 알아보고 말을 건넸다. “아이고 삼성도 참 징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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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반도체 작업 뇌종양 피해자인 한혜경씨의 어머니 김시녀씨(중앙)가 삼성전자 사옥 앞 반올림 농성장을정리 하고 있다./우철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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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씨 사례가 알려지자 뇌종양 진단을 받은 전자산업 노동자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백혈병 제보는 있었으나 뇌종양 제보는 거의 없었다. 어머니 김씨는 “역시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혜경씨의 문제제기로 반도체 노동자와 뇌종양 발병률을 살피는 역학조사도 시작됐다.

2017년 3월 근로복지공단은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했던 오모씨(당시 58세)가 제기한 뇌종양 요양급여 신청을 산업재해로 인정했다. 근로복지공단이 삼성반도체 노동자의 뇌종양을 산재로 인정한 첫 판단이었다. 그 해 11월에는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뇌종양에 걸린 고 이윤정씨가 대법원에서 산재 인정을 받았다.

재판부는 “이씨는 6년 2개월 동안 벤젠, 포름알데히드, 납, 방사선 등 여러 발암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됐다”며 “발암물질의 측정수치가 노출기준 범위 안에 있더라도 여러 유해인자에 복합적으로 장기간 노출되거나 주·야간 교대근무 등 기타 유해요소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할 경우에는 건강상 장애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해당 판결 이후 뇌종양 노동자를 산재로 인정하는 판단이 줄줄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김씨는 “우리 혜경이가 길을 터놔서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고 산재로 인정까지 된 거니까 혜경이가 산재로 인정받은 거나 다름없다”고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왜 우리 혜경이만 인정이 안 될까” 하는 서운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지난해 5월 혜경씨 소송을 대리한 임자운 변호사가 근로복지공단 재신청이라는 마지막 기회가 있다고 알려왔다. 김씨는 딸이 또 한 번 상처를 받게 될까봐 망설였다. 반면 혜경씨는 확고했다. “내가 삼성에서 일한 게 맞잖아요. 그 전에는 건강했거든요? 그리고 저 말고도 뇌종양에 걸린 사람들이 많으니까 당연히 다시 심사를 받고 싶었어요.”

지난 4월 29일 혜경씨와 어머니 김씨는 산재를 판단하는 질병판정위원회를 찾았다. 혹시 당사자에게 발언기회가 주어질지 몰라 자필로 진술서를 썼다. 열 문장을 쓰는 데 4시간이나 걸렸다. 혜경씨는 근로복지공단이나 재판에서 한 번도 진술을 한 적이 없다. 이날 혜경씨는 10년 만에 자신의 입장을 소리 내 말했다. “제가 예전에 산재 인정이 안 된 이유는 제 병의 원인이 아직 잘 밝혀지지 않았다는 거였어요.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는 거 알아요. 반도체, LCD 공정에서 뇌종양 피해자가 많이 나왔고, 또 명확히 입증 못해도 산재보험 취지상 뇌종양도 산재로 인정되는 분들이 여럿 생겼잖아요. 저에게도 공정하게 판정해주시면 좋겠어요. 저는 꼭 산재로 인정받아서, 앞으로 저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어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6월 14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산재 인정 축하음악회 ‘당신에게선 꽃내음이 나네요’가 열렸다. 혜경씨가 그날 부른 가수 4월과 5월의 곡 ‘장미’의 가사에서 따온 제목이다. 지난 6월 10일 자택에서 만난 혜경씨는 “당신의 모습이 장미꽃 같아. 당신을 부를 땐 당신을 부를 땐 장미라고 할래요”라는 부분을 부르고 또 불렀다.

산재 인정 직후 반올림은 “전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말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한혜경님은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오셨습니다. 한혜경님이 이전에는 없는 길을 만들어오셨기에, 그 길을 따라 다른 뇌종양 피해자들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의미를 설명했다.

모녀는 이번 산재 인정이 끝이 아니라고 했다. 지난 10년의 결과라기보다는 앞으로도 계속될 투쟁의 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혜경씨는 “제가 반올림 활동의 중심이 되지는 못해도 힘이 되는 데까지는 갈래요”라고 말했다. 김씨가 혜경씨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역시 너는 내 딸이야.”

<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



재판부, 왜 의학적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나

판사는 의사가 아니다. 의학적 지식이 필요한 재판에서 판사의 판단을 좌우하는 것은 양측이 제출하는 각종 의학자료들이다. 결국 판사를 설득할 만한 입증자료를 얼마나 많이, 정확하게 제시하느냐가 승패를 가르는 요인이 된다. 문제는 의학적으로도 각종 발병원인과 질병 간의 인과관계를 밝히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게 담배소송이다. 폐암 등 각종 질병에 걸린 환자들은 2011년 담배를 제조·판매한 국가와 ㈜케이티앤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지만 대법원은 2014년 4월 10일 원고 패소 확정판결을 내렸다. 담배를 피운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폐암에 걸리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의 폐암환자들이 20~30년씩 장기간 담배를 피운 만큼 다른 요인도 배제할 수 없어 담배와 폐암 발생 간의 인과관계를 곧바로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본 것이다.

일반인들은 담배를 많이 피우면 폐암에 걸릴 것으로 생각하지만 정작 법원은 이 같은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담배 안의 각종 성분이 폐암에 어떤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의학적 분석 자체가 부족한 탓이다.

산업재해에서도 이 같은 논리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 정하는 업무상 재해는 업무와 사망원인이 된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의 ‘인과관계’는 결국 의학계가 입증해놓은 결과물 이상의 내용을 도출하기 어렵다. 의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질병까지 법원이 산업재해로 인한 것으로 판단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일선의 한 의료전담 판사는 “A라는 요소로 B라는 결과(발병)가 발생한다는 의학적 도식이 바로 성립된다면 사측의 책임을 물을 수 있지만 문제는 발생할 수 있는 원인이 다양하다는 데 있다”며 “아무리 재판부가 해당 작업환경상 당연히 노동자가 병에 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더라도 의학적으로 ‘한 가지 원인만으로는 발병할 수 없고,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는 감정결과서가 오면 재판부도 감정결과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는 곧 사측이 유리한 위치를 점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선 작업현장에서 발생하는 각종 질병 유발 물질들에 대한 정보는 기본적으로 회사가 독점적으로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노동자들은 작업현장의 어떤 물질들이 자신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다. 의학적으로도 크롬이나 벤젠 등에 장기간 노출될 경우 유병률이 높아진다는 연구결과가 있을 뿐이다. 장기간 화학물질에 노출된 채 근무했더라도 희귀병에 걸렸을 경우에는 산업재해로 보지 않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소재 분야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물질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는 의학계에서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의학적 의견을 받아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사법부로서는 의학적 정보가 부족한 ‘작업현장과 유병률’의 상관관계를 소극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이흥재 전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는 ‘업무상 재해의 인정기준에 관한 판례의 경향’ 논문에서 “판례는 과로사의 업무기인성에 대해서는 상당히 폭넓게 인정하고 있지만 사인이 불분명한 청장년급사증후군과 그 원인 및 과로와의 관련이 의학상 입증되지 않은 질병에 대해서는 업무기인성을 부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업무기인성의 판단은 반드시 직접증거에 의해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돼야 하는 것은 아니므로 근로관계상의 제반 사정을 산재보험법의 목적에 비춰 종합적으로 고려해 피해자 보호 필요성 여부가 그 기준이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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