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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8 (월)

“햇살 따가우면 누구든 양산 쓰세요, 언젠가 돌려주시면 됩니다” [김동환의 김기자와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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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열 미술작가 ‘우리의 그늘’ 캠페인 / 李씨 자비로 양산 150개·거치대 마련 / 10개 중 1개 돌아와… 회수율 저조해도 / 언젠가 돌려 줄 사람들의 양심 믿어 / 단 한사람이라도 감동 준다면 큰 의미

“캠페인을 시작한 지 일주일 정도 지났는데 혹시 돌아온 양산이 있나요?”

지난 10일, 처음 만난 기자의 질문에 설치미술작가 이효열(33)씨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돌려주지 않아서 밉다’거나 ‘싫다’는 표정이 아니다. 오히려 ‘언젠가는 다시 돌려주겠죠’라는 믿음이 묻어나는 것 같다.

◆양산 대부분 자비로 구입해 나눠줘… 지난해 우연히 ‘살아있는 양심’ 발견

서울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와 시청 인근 횡단보도 그늘막 등 3곳에 이씨가 만든 ‘우리의 그늘’ 캠페인 양산 거치대가 있다. 초록색 플라스틱 고리 2개를 그늘막 기둥에 걸어둔 것이어서 거창하지는 않다. ‘너무 더우면 누구나 양산 쓰셔도 돼요’라는 메시지로 시민들이 잠시나마 땡볕을 피하게 돕는다. 지난해 7~10월 캠페인 당시 150개 정도를 비치했던 양산의 회수율은 10% 정도라고. 지난 1일 시작한 올해 캠페인에는 양산 100개를 준비했다는데 여름이 지나고 얼마나 돌아올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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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와 서울시청 인근 횡단보도 그늘막 등 3곳에 이효열 설치미술작가가 만든 ‘우리의 그늘’ 캠페인 양산 거치대.


대부분 양산은 이씨가 자기 돈으로 마련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서 쓰지 않는 양산을 기부한 이도 있지만, 매우 적어 사실상 이씨가 홀로 캠페인 벌이는 셈이다. 단체 차원의 기부도 없었다고 한다. 양산 10개 중 1개만 돌아온 셈이어서 낮은 회수율에 실망할 법한데, 이씨는 “언젠가는 돌려주시겠죠”라고 사람 좋은 웃음만 짓는다. 거치대에 ‘꼭 가져다 놔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 것도 쓰는 사람의 양심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이씨는 지난해 거치대를 돌아보다 우연히 ‘살아있는 양심을 마주했다. 썼던 양산을 시청 앞 거치대에 돌려놓는 여성을 멀리서 발견했다. 일행과 나타난 여성은 양산을 고이 접어 거치대에 조심스레 올려두고 자리를 떴다. 예상치 못한 일에 이씨는 감동했다고 한다. 캠페인의 취지에 공감해 사용하던 부채를 거치대에 놓고 간 사람을 봤을 때도 흐뭇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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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데 의미… “시원한 하루 보내시기를”

기자는 10~11일 이틀간 이씨와 동행했다. 전날 누군가 가져간 양산이 다음날 제자리로 돌아왔는지 보기 위해서다. 거치대 3곳 모두 텅 빈 탓에 허탈했던 기자와 달리 이씨는 밝은 표정으로 새로운 양산을 가방에서 꺼냈다. 그는 돌아오지 않은 양산에 대한 아쉬움보다 지금 놓은 양산이 곧 누군가에게 더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뿌듯함이 더욱 커 보였다.

이씨는 경기도 시흥시와도 지난해 여름에 같은 캠페인을 진행했다. 그가 그늘막 기둥에 거치대를 설치하면, 청소년 활동가들이 기부받은 양산을 놓는 방식이다. 이씨는 당시 보도자료를 통해 “소소할 수 있지만 단 한 사람에게라도 감동을 줄 수 있다면 큰 의미가 담긴 캠페인이 될 것”이라며 “시민들의 미담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소규모 기업과 대학 등에서 설치미술·일상 소재의 강연 경험이 있어서 ‘공공분야 활동가’로 보는 일부 시각과 관련해 이씨는 “세상에는 나보다 더 좋은 활동을 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겸손해했다. 그는 여건이 허락한다면, 내년뿐 아니라 앞으로 계속 힘닿는 데까지 캠페인을 이어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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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둘째 날, 시청 앞 거치대에 새 양산을 꺼내놓는 이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쓰신 양산을 바로 돌려주시지 않아도 돼요. 나중에 날씨가 선선해지면 그때 주세요. 한 분이 돌려주신 양산은 뜨거운 햇볕 아래 다른 분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혹시 남는 양산이 있으시다면 ‘우리의 그늘’ 캠페인 거치대를 채워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더욱더 따뜻한 캠페인이 완성되겠죠. 많은 분께서 여름 내내 시원한 하루를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김동환 글·사진=kimchar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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