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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쪽수·글씨체·형광펜…‘검증의 늪’에 빠진 양승태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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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건의 시작 쪽수는 왜 다른가. 원본 파일 글씨체는 ‘함초롬바탕체’인데, 출력물은 왜 아닌가. 형광펜 표시는 왜 돼있나.

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재판장 박남천 부장판사) 심리로 열리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 재판에서 밑도 끝도 없이 지루한 검증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법정에서 하루 종일 원본 파일과 출력물의 차이를 대조하는 사이, 피고인인 양 전 대법원장은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14일은 양 전 대법원장과 박·고 전 처장 측 변호인들이 요청해 열린 검증 기일이었다. 변호인들은 검찰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이동식저장장치(USB)에서 확보한 법원행정처 문건의 한글파일과 이를 출력해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한 자료가 동일한지를 믿을 수 없다면서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검찰이 출력하는 과정에서 자료의 내용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변호인들은 사법농단의 핵심 증거인 임 전 차장 USB 문건의 증거능력 인정과 관련해 중요한 작업이라고 했고, 재판부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절차”라고 했다.

경향신문

‘사법농단’ 사건으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가운데)과 박병대(오른쪽)·고영한(왼쪽) 전 법원행정처장이 지난달 29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첫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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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서는 이례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검찰이 임 전 차장 USB에서 확보한 법원행정처 문건 한글파일을 화면에 띄워 보여주고, 재판부와 변호인들은 증거로 제출된 출력물 자료와 일치하는지를 일일이 확인했다. 이렇게 대조해야 하는 파일이 총 1142개다.

그러나 이날 오후 2시부터 밤 9시30분까지 무려 7시간30분에 걸쳐 진행된 검증 기일에서 법원행정처 문건 내용을 검찰이 조작한 정황은 특별히 발견되지 않았다. 정작 변호인들은 소극적인 태도로 지엽적인 지적들만 했다.

‘쪽수’ 공방이 대표적인 예다. 박 전 처장 측 변호인은 검찰이 같은 문건을 2개 제출했는데 왜 하나는 쪽수가 1쪽이라고 돼있고, 다른 하나는 25쪽이라고 돼있느냐며 문제를 제기했다. 검찰 설명에 따르면 이는 기술적인 문제였다. 문건 별로 파일을 만들면 1쪽부터 시작하고, 여러 문건을 하나의 파일로 만들면 쪽수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함초롬바탕체’ 공방도 마찬가지다. 검찰이 헌법재판소 주요 사건을 정리한 법원행정처 문건을 제시하자 이번엔 고 전 처장 측 변호인이 이의를 제기했다. 파일과 출력물의 글씨체가 다르다고 했다. 검사는 “출력할 때의 컴퓨터에 함초롬바탕체 폰트가 설치돼있지 않아서 다른 기본 글씨체로 출력된 것 같다”고 해명했다. ‘휴먼둥근헤드라인체’, ‘맑은고딕체’, ‘휴먼옛체’ 등 각종 글씨체가 언급됐다.

18·19일 잇달아 열린 검증 기일에서는 ‘형광펜’ 공방이 벌어졌다. 변호인들은 출력물의 형광펜 표시가 파일과 왜 다르냐고 지적했다. 혹시 형광펜을 검사가 마음대로 칠한 게 아니냐는 주장이다. 검사는 “검찰도 문건을 봐야하니까 주요 부분을 표시해서 출력한 것”이라며 “원본 파일에 형광펜 표시를 저장하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변호인들은 검찰이 법정에서 보여준 파일이 검찰 서버의 어디에 저장돼있는지, 과연 임 전 차장 USB에서 확보한 게 맞는지를 계속 따졌다.

장시간 재판에 피고인인 양 전 대법원장은 피곤한 듯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양 전 대법원장 측 변호인은 “피고인들이 고령인데다가 건강이 안 좋으신 분도 있다”면서 피고인들을 빼고 검증하자고 요청했다. 박 전 처장은 병원 진료 때문에 재판에 참석을 못한다고 했다. 검찰은 “매우 무책임한 처사”라며 “(검사가 증거를 조작했다는) 근거없는 의혹제기를 해놓고 피고인과 변호인들이 방관자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해 다른 의도가 있는게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정다주 판사 등 현직 법관 증인들이 불출석 의사를 밝히면서 예정된 증인신문은 무산됐다. 정 판사는 21일 출석하게 돼있었다. 정 판사는 자신이 담당하는 재판 때문에 출석을 못한다고 재판부에 사유서를 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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