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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경계 실패 들킬까 우려했나···北목선 '오보'까지 그냥 둔 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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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경계 실패 축소·은폐 뒤늦게 들통

군 기강 해이 비판 못 면할 듯

정경두 “실태 점검해 책임 물을 것”

중앙일보

정경두 국방부 장관(왼쪽 셋째)은 19일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에서 북한 어선의 삼척항 입항 사건에 대해 ’엄중하게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왼쪽부터 심승섭 해군참모총장, 박한기 합참의장. [장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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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는 “전투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는 격언이 있다. 그렇다면 경계에도 실패하고, 이를 덮으려고 거짓말한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난 15일 귀순한 북한 목선이 앞서 나흘 동안 마음대로 항해한 것도 모자라 삼척항에 유유히 입항했는데도 군은 이를 파악하지 못하고 깜깜이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게 두려웠는지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했다. 군 당국은 지난 17일 사건 경위를 설명하면서 북한 목선이 삼척항 방파제 부두에 정박한 사실을 감췄다. 대신 모호하게 “삼척항 인근에서 발견됐다”고 언급했다. 이는 항구가 아닌 바다에서 북한 목선을 파악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도록 표현을 살짝 뒤튼 것이다. 나중에야 군 관계자는 “당시 조사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확인이 필요해 포괄적으로 답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 선원들이 삼척항에 내려 주민과 대화하며 휴대전화를 빌려달라고 할 때도 군 당국은 목선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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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삼척항에 정박한 북한 선박과 주민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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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당국은 또 이날 발표에선 북한 목선이 표류했다고 알렸다. 그러면서 “해안에서 6㎞ 떨어진 곳에서 2t 정도의 목선이 기동할 경우 (해안 감시레이더가) 잡는다(발견한다)”고 장담했다. 북한 목선이 스스로 움직인 게 아니라 조류에 쓸려서 떠내려왔기 때문에 식별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북한 목선은 표류해서 떠내려온 게 아니라 삼척 앞바다에서 엔진을 끈 채로 밤을 새웠다. 그러곤 아침이 되자 멀쩡하게 엔진을 다시 켜서 삼척항에 들어갔다. 북한 목선의 입항을 찍은 CCTV 화면을 보면 긴박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여유롭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표류해서 발견하기 어렵다더니 사실은 하룻밤을 바다에서 머물 정도로 멀쩡했던 ‘대기 귀순’이었다.

그간 군 당국은 기사가 사실이 아닐 경우엔 적극적으로 해명에 나서곤 했다. 이번엔 북한 목선을 최초로 신고한 사람이 조업 중인 어민이라는 보도가 한때 등장했다. 하지만 최초 신고자는 삼척항 방파제를 산책 중이었던 주민으로 밝혀졌다. 군 관계자는 “최초 신고자는 군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사항은 아니다. 언론의 추측”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오보에 엄격했던 군이 이번엔 왜 ‘조업 중인 어민’이 아닌 ‘방파제의 주민’이라고 신속하게 알리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경계 실패를 조금이라도 희석할 수 있어서 오보를 지켜만 본 것은 아닌가.

군 당국은 17일 경위 발표 때 장비가 낡거나 성능이 부족한 탓이라며, 다들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그러다 19일 육군과 해군 지휘관에게 잘못이 있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이날 “경계작전 실태를 꼼꼼하게 되짚어 보고, 이 과정에서 ‘책임져야 할 인원’이 있다면 엄중하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다. 이틀 만에 없던 책임이 갑자기 생겨났다. 그러니 군 주변에선 꼬리 자르기에 나섰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국방부는 남북 화해기를 맞아 혹여 군 기강이 해이해지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을 때마다 “우리 군의 대북경계 및 군사대비 태세 이완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해 왔다. 하지만 이런 해명은 목선 사건으로 궁색해졌다. 목선도 발견하지 못하는 군이 북한군 반잠수정, 잠수함은 제대로 막고 있는 것인가. 목선에도 뚫리는 군에 국민이 어떻게 안보를 맡기겠는가.

이철재 기자 seaj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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