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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 고통 망각은 내 고통의 시작…전쟁 비극 잊지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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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모시는 사람들' 김정숙 대표 인터뷰

뮤지컬 '블루 사이공' 28∼30일 대학로예술극장서 재연

(서울=연합뉴스) 박수윤 기자 = 1996년 2월. '블루 사이공'이라는 제목의 뮤지컬이 대학로 서울두레극장에 올랐다.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 전 자신감에 한껏 취한 사람들이 매혹될 만한 소재는 아니었다. 베트남전(1964∼1975)에 파병된 한국군 김상사와 베트콩 여인 후엔이 고발하는 전쟁의 참상은 눈 감고 싶을 정도로 생생했다.

하지만 한 회 두회 공연이 거듭되며 입소문이 났다. 영국 뮤지컬 '미스 사이공'이 사실상 침략자인 미국을 마치 구원자처럼 묘사했다는 비판을 받았다면, 한국 뮤지컬 '블루 사이공'은 전쟁을 기억하라는 메시지를 명징하게 그렸다.

귀국한 한국군과 그들의 2세는 평생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린다. 노년의 김상사는 정신착란 속에 말한다.

"죽지 않으려고, 살고 싶어서 그랬어. 무서워서 내가 총을 쏜 거야. 나 때문에 사람들이 죽었어. 내가 잘못 한 거야."

평단 반응도 뜨거웠다. 서울연극제 현대소나타상(1996), 백상예술상 대상·작품상·희곡상(1997), 한국기독교 문화대상 뮤지컬 부문 대상(2000), 국회문화대상 뮤지컬 부문 대상(2002), 희곡작가협회 올해의 작가상(2003)이 이 작품에 쏟아졌다. 손병호, 송창의 등 유명 배우들이 '블루 사이공'을 거쳐 갔다.

깊은 성찰이 느껴지는 작품을 쓸 때 저자는 새파랗게 젊었다. 극단 '모시는 사람들' 김정숙(58) 대표는 1996년 이 작품 초연 당시 35세였다. 그는 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결정한 2004년 '블루 사이공' 공연 중단을 선언했다. 아무리 예술로 전쟁의 비극을 고발해봤자 소용없다는 무력감 때문이었다. 이후 대학로 히트작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 등 다른 작품을 써내며 '블루 사이공'은 구석에 조용히 치워둔 듯했다.

그런 '블루 사이공'이 15년 만에 부활했다. 오는 28∼30일 대학로 공연을 앞뒀다. 극단 '모시는 사람들' 창단 30주년을 맞아 관객들 요청이 쏟아지면서다.

최근 김 대표와 연락이 닿았다. 종로구 수송동에서 만난 그는 단출한 여름 소재 셔츠 차림이었다. 비극적 전쟁문학을 쓴 작가이자 연출가가 맞나 싶을 정도로 화장기 없는 얼굴은 해맑았다.

다음은 김 대표와 일문일답.

연합뉴스

극단 '모시는 사람들' 김정숙 대표
(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15년 전 '블루 사이공' 공연 중단을 결정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 위기의식을 느꼈어요. 월남에서 돌아온 수많은 김상사님을 취재하면서 그분들의 고통을 알게 됐는데, 참전을 반복하다니요. 그분들의 희생과 고통을 잊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뮤지컬이 무의미한 결과를 낳는다면 안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제가 착각한 게 있었어요. 왜 공연 중단을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걸까요. 제가 대표여도 혼자 만든 작품이 아니었는데요. 그 결정 이후 많은 단원이 가슴 아파했어요. 권호성 연출은 '누나가 그렇게 얘기하면 앞으로 다시 못 보잖아, 왜 그랬어' 원망했습니다. 한동안 후회했어요.

-- 이번에 다시 무대에 올리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가.

▲ 관객들이 다시 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 차례 다시 보고 싶은 뮤지컬 1위로 뽑혔지요. 오늘날 극단을 있게 해준 관객들에게 보은하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김상사님들의 고통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잊는 건 내 고통을 준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경각심을 가져야 해요. 우리는 지금도 휴전국이지 종전국이 아닙니다. 전쟁이란 환경에 다시 놓이지 않기 위해 과거의 고통을 환기하고 싶었어요.

-- '블루 사이공'에 "우리 할아버지 주소는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읍 토속리 1구 1033"이라는 대사가 주문처럼 반복된다. 대표와 관련된 주소인가.

▲ 아버지가 함경남도 북청 분이세요. 북에 사슴 같은 만삭의 아내와 아들 둘을 두고 남쪽에 내려오셨대요. 엄마는 6·25 때 남편과 가족을 다 잃었어요. 폭격으로 집에 우물이 생길 정도였대요. 두 분 다 10년을 혼자 살다가 1959년 재혼하셨죠. 엄마가 37세, 아버지가 40세에 저를 낳았어요.

-- 전쟁이라는 소재를 다룬 데 그런 배경이 있었나.

▲ 어릴 때 TV에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나오면 몰래 나가서 대문을 잠갔어요. 이북에 있다는 큰엄마나 오빠들이 내려와서 아빠를 데려갈까 봐요. 늘 엄마가 불쌍했어요. 아버지는 항상 추억 속 여자와 현실 속 여자, 두 여자와 살고 있었으니까요. 제가 '찌끄래기(찌꺼기)'처럼 느껴졌죠. '블루 사이공'을 보러온 분들은 이런 시대를 겪었어요. 아, 나 저 이야기 아는데, 내가 겪은 일인데 하고 눈물 흘리는 거죠.

--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생존자들은 한국 정부에 사과를 요구한다는 뉴스를 보았나.

▲ 봤지요. 해야죠. 당연히 해야죠. 사과를 바라는 분들의 연령대가 '블루 사이공' 김상사(극중 1943년생)와 비슷해요. 죽음을 앞두고 나에게 왜 그랬냐, 사과하라고 호소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일본에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더 늦기 전에 참회할 기회를 만들고, 치유하려고 노력해야 해요. 언젠가 베트남에서도 공연하고 싶습니다. 그 자리에서 함께 울 수 있다면… 나를 잊지 않았구나, 너 또한 그리 힘들었구나, 서로의 고통이 맞닿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연합뉴스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 대표는 1982년 극단 에저또에서 연극을 시작했다. 1984년 '마지막 키스를 당신께'로 연출 데뷔를 했고, 1989년 극단 '모시는 사람들'을 창단했다. 해외 라이선스 작품 수입이 본격화한 시절, 우리 이야기를 하는 게 목표였다. 평생 연극과 관객을 모시겠다는 마음으로 극단 이름을 지었다. '배고픈 연극'이라는 상투적인 수식어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40년 가까이 연극계를 지키는 게 어땠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 극단을 지킨 원동력이 무엇이었나.

▲ 최고로 좋아해서요. 연극을 잘하는 것 외에는 다른 꿈이 없었어요. 이 일을 할 때 제일 보람을 느끼고 살아있는 것 같아요. 무대 너머 배우와 관객을 바라보는 느낌은 말로 형용할 수 없어요. 저절로 무릎을 꿇게 돼요.

-- '쌀밥에 고깃국', '뒷동산에 할미꽃', '강아지똥' 등 어린이 연극도 참 많이 했다.

▲ 학교를 찾아가 연극하는 걸 참 좋아해요. 셰익스피어 시대 활어(活魚) 같은 관객을 만날 수 있거든요. 그래서 1년에 한 편씩은 꼭 어린이 연극을 만들려고 노력해요.

요즘은 아이들이 유튜브로 문화를 접하는 시대예요. 그러나 윈도우 OS로 인성을 배울 수 있나요? 인터넷은 설익은 지식과 기술로 도배되고 사람의 마음은 소외됐어요.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야 '아,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저 사람이 마음 아프겠지' 알 수 있어요. 이야기가 없으면 인간은 빈 깡통이나 마찬가지예요. 사람을 배울 수 있는 연극이 갈수록 중요해질 거라고 생각해요.

-- 볼거리가 너무 다양해진 때문일까. 대학로에서 관객 감소는 오래된 고민거리다.

▲ 솔직히 연극계에 인재가 부족해요. 잘하는 배우, 좋은 작가, 연출가들이 TV로 옮겨간 뒤 돌아오지 않아요. '연극은 마음의 고향'이라고 하면서도 고향과 돈을 바꿔버리지요. 연극하는 사람들이 더 노력해야지요.

그는 인터뷰 내내 '짓는다'는 단어를 반복했다. 연극이란 집을 지어 올리듯 배우와 관객이 이야기를 쌓아 올리는 것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지나가는 말로 꿈이 뭐냐고 물었다. 예순을 코앞에 둔 그는 10년 뒤 '이야기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상을 펼치는 그의 목소리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연합뉴스

극단 '모시는 사람들' 김정숙 대표
(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cla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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